화요일, 5월 25, 2021

그늘

나이가 들어서 그늘이 있는 것이 멋이 없다는 말을 듣고 오늘 좀 슬퍼졌다.

듣고보니 정말 그렇드라. 어릴 적에 나를 사로잡고 있던 그늘. 짙은 그늘이 때로 참 매력적이기도 했고, 동경할 만한 어떤 것이었는데.. 멋지다고 느껴지는 어른들의 모습을 떠올려보니 그늘이 없는 맑고 밝은 영혼을 가진 사람들이다. 장루이 선생님도 그렇고.. 물론 그늘 없는 사람은 없겠지만, 내가 멋지다고 생각하는 어른들은.. 자신의 그늘을 볕과 함께 둘 줄 아는 사람들이겠지. 어제 한껏 우울하고 쳐져 있던 내 모습이 떠오르면서 갑자기 너무 슬퍼졌다. 나도 그늘이 없는 사람이 되고 싶다. 사실 이렇게 그늘이 가득하지만, 겉으로는 아주 밝고 목소리d에 그늘이 없어보이거든. 그래서 사실 그 말을 들은 것이었다. 내 목소리에 그늘이 하나도 없다며 한 시름 놓은 듯이 기뻐하던 분의 목소리. 오늘 아무튼 그 한마디가 하루종일 나를 친다. ~ ~ ~ 

월요일, 5월 24, 2021

2019년 11월 6일에 쓴 일기를 발견했다. 왜 이리 슬퍼 ㅎ 


모든 게 이상하고 괴로운 날도 있지. 아침부터 시작된 짜증들. 그 와중에 내가 무엇도 잃어버리지 않은 것에 대해 감사해야 하는 걸까? 불행 속에서 애써 행복을 찾아야 하는 것. 사는 것이 그렇다. 행복 속에서는 애써 불행을 찾지 않지만, 왜 늘 불행은 그대로 그렇게 나에게 다가와 있는 것이며, 나는 그것을 느끼며, 왜 나는 그래야만 하는가? 나아질 수 있을까. 응 나아질 수 있을 거야. 나도 모르게 습관처럼 나오는 대답. 그리운 이가 없다.

내 동생과 나의 엄마, 고양이. 이렇게 그리워.

사랑은 다 스러졌다...

늘 슬픔은 예견되고, 기쁨은 예견하지 못했다. 그런 채로 다가오는 것. 갑자기 이제는 졸리다. 사람의 의식이 얼마나 강한지 느낄 수 있는 대목은 - 내가 앞으로 달려가고 있다고 생각했다는 것. 실은 기차는 거꾸로 가고 있는데 말이다. 

금요일, 5월 21, 2021

나이가 들어 더 지혜로워지고 뼈는 더 연약해져 있을 나의 모습이 쉬이 그려지지 않는다. 사실 그런 모습은 보이질 않는다. 어쩌면 펼쳐진 시간에 그런 장면은 없는 것은 아닐까. 이런 생각이 점점 잦아진다.
두근거린다. 언제 또 내가 무얼 잘못했을까. 모두 다 일부러 그런 것은 아니지만 아무도 이해할 순 없을 것이다. 나의 행동은 결코 이해받을 만한 것들도 아니거니와, 굳이 이해받아야 할 가치도 없을 것이다. 굳이 가치를 따지자면 말이다. 백 번은 돌이켜 헤아려보았을 때, 조금 알 수 있을까. 하지만 누구도 그 누군가를 위해 백 번까지 헤아려보지 않을 것이다. 그런 수고는 아무도 하지 않는다.
'아무 것도 하지도 않으면서'
그게 내 인생을 설명하는 말인 걸까. 
소리가 점점 더 커진다.
오늘은 정말 정말 다리가 아프다.
그리고 사실은 예상했던 기분이 찾아왔다.
어쩌면 이 기분을 찾기 위해 취한 것들이 있다.
때로 사람들이 욕하는 사람들이 내게 더 가깝다.
다 버리고 다 바꾸면 무언가 새로워질까.

목요일, 5월 20, 2021

꿈을 아주 많이 꿨다. 어려운 노래를 잘 부르다가 틀리기도 했고, 따돌림을 당하기도 했고, 미움을 받았다. 억울하고 서운하고 너무 슬프고 무서워서 엉엉 울었다. 내가 너무 슬프고 불안하여 선생님을 찾아갔는데, 선생님은 이미 내가 올 것을 알고 준비하고 계셨다. 선생님 얼굴은 윤 쌤이었고, 선생님 부인은 배우 김지수였다. 전기자극을 통해 검사하기로 했다.

사람을 그렸다. 그렇게 그린 사람의 형상을 태양으로 만들었다. 메모장에 내가 그런 그림도 실제로 그려놨다. 꿈일기를 쓰면서 또다시 꿈을 꾸느라 모든 것이 꿈이 되어버렸다.

꿀꿀한 날씨. 그래도 기분은 나쁘지 않았다. 우체국에 들러 볼일을 보고, 필름을 맡기고, 맛있는 커피를 마셨다. 스캔본이 일찍 도착해서 오늘 저녁 동안에는 사진을 들여다보았다. 모두 약간은 빛이 바래있다. 코니카 팝도 그렇고, 케녹스도 그렇고 아무래도 약간은 심심하고 밋밋한 색을 보여주는 것 같다. 미세먼지 때문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마르세유에서는 모든 것이 알록달록하고 아름다운 것 같았는데 말이다. 그래도 이제 다시 사진을 찍으며 쏘다니게 된 것 같아서 기분이 좋아졌다. 근 몇 달간은 카메라를 잘 들고 다니지도 않았다. 어둡고 어둡고 힘이 없는 계절이었다.

오늘 미셸은 두 번이나 탈출을 시도했다. 맨발로 뛰쳐나갔다. 다시 신발장을 정리하고 방묘문을 닫았다. 다시 방묘문을 철저하게 닫고 다녀야지. 지금 미셸은 책상 위에 엎드려있다. 일기를 쓰고 있는 내 팔 옆에 있다. 나를 사랑하는 미셸. 미셸을 사랑하는 나. 행복해. 

수요일, 5월 19, 2021

부처님 오신 날

하루 종일 웃었다. 아직도 입가에 미소가. 오늘의 습관인가보다. 다시 웃는 습관이 들었으면 좋겠네 예전처럼. 오늘은 보틀라운지에서 비우장을 열었다. 곳간에서 판매하고 있는 물건들을 들고 나갔다. 아무도 사지 않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는데, 생각보다 꽤 선전을 펼쳐서 기분이 좋다. 모자 선물도 받았고, 은진에게 린넨 원피스도 하나 샀다. 모든 것이 마음에 들어.

오늘 우리의 물건을 가져간 모두와, 우리와 마주친 모두에게 감사를 ! 사랑을 ! 축복을 !

또 오늘은 내 리코가 꽤 상태가 괜찮아져서 사진을 많이 찍었다. 내일 비가 온다고 했지만, 잠시 그치는 때가 있으면 필름을 맡기고 와야지. 이안이네 가서 다 같이 저녁을 먹었다. 종일 햇빛 아래에서 시간을 보내서 그런지 유난히 더 배가 고팠다. 정말 정말 참을 수 없이. 우리는 정신없이 밥을 먹고, 맥주도 조금 마시고, 게임도 했다. 화투가 왜 이리도 재밌던지 ! 다들 너무 귀엽고 웃기고 재밌었다. 오지의 손에는 오늘 행운이 깃들었는지 우리가 거의 승리를 거머쥐었다. 

그리고 오늘의 마지막 코스. 지난번에 약간 아쉬웠던 백사실 원정을 나섰다. 그때보다 더 믿음직스러운 멤버가 추가되어서 힘차게 나아갔다. 함께 가니 어두운 산길이 하나도 무섭지가 않고, 우리는 정말 빠르게 이미 연못까지 도착해있었다. 연못에서 들리는 산새소리, 풀벌레 소리에 집중하다가 사진도 찍고, 사랑채가 있던 자리 옆에 펼쳐진 너른 풀밭에 올라 밝은 하늘을 보았다. 밤인데도 환했다. 구름이 많아서. 그 아래에서 우리는 서로의 얼굴을 볼 수 있었다. 너무 즐거웠다. 사진이 과연 잘 나왔을까. 혹시 어떤 영혼이 찍히진 않았을까 궁금하고 기대가 된다. 백사실계곡에 올라 구름에 가려져 잘 보이진 않았지만, 그 뿌옇고 희미한 달빛을 바라보며 에너지를 받은 걸까. 나름 종일 피곤했을 법하기도 한데, 꽤 컨디션이 괜찮았다. 내려와 서로 인사를 나누고 우리는 버스를 타고 집에 돌아왔다.

아주 고요한 우리 동네. 어둡고. 모두 일찍 잠이 드는가 보다. 집에 돌아와 아이들 밥을 챙겨주고 화장실을 치워주고 바닥을 쓸고.. 우리 샤워도 하고.. 어제는 일기를 빠뜨렸지만, 오늘은 이토록 즐거운 날을 꼭 기록하려고 일기를 쓰는 중이다. 사실 어제도 오늘 못지 않게 아주 아름답고 즐거운 날이었는데..! 에무시네마의 비밀공간에서 한바탕 초록 내음을 맡고, 초록을 눈에 담고 왔다. 미나리를 드디어 보았다. 오지와 이안이 우리 셋은 하나같이 미나리가 좋았다. 이런저런 할 말이 많기는 하지만, 오늘은 구구절절하지 말아야지.

아 그리고 오늘은 꿈에 내가 생일이었다. 생일 선물을 정말 많이 받았다. 멋진 배우가 내 친구였고, 그 친구는 나를 좋아했다. 자기가 늘 챙겨 다니는 야채 도시락을 이제부터 내 것까지 챙겨오겠다고 했다. 웃기지만 나름 아주 감동적이고 설레는 장면이었다. 그 친구와 가까워지기 위해 나도 더이상 사용하지 않던 메신저에도 열심히 들어갔다. 참 웃기다.

그런데 일어나서 오지에게 꿈 얘기를 열심히 하고 생각해보니 오늘은 부처님 오신 날이었다. 꿈에 나도 생일이었는데, 내 안에 부처님이 계신 걸까. 기분이 하루 종일 좋았다. 부처님 오신 날. 날씨도 좋고, 즐겁고, 행복하고, 더운 날. 한동안 사람들을 만나는 것이 불편하고 귀찮았는데, 이제 집에 돌아오는 길에도 기분이 좋다. 겨울이 지나가고 나니 정말 살 것 같다. 계속 우리의 계절이 이렇게 뜨거웠으면. 

월요일, 5월 17, 2021

3

나와 친구 둘, 셋이서 우리는 어느 집에 숨었다가 탈출하기 위해 작전을 세웠다. 

오지는 셋의 몸이 합쳐졌다고 했다. 

이안이는 나와 오지 이렇게 셋이서 전시를 보러갔다고. 나는 이안이에게 자일리톨 3알을 주었다.

3개의 팔

3개의 질문 


일요일, 5월 16, 2021

 이퀼리브리엄

토요일, 5월 15, 2021

항생제 부작용인 것 같다. 하루종일 설사를 했고 배가 아팠다. 지금은 다리에 가려운 두드러기도 났다. 

일을 마치고 집에 돌아와 밥을 해먹고 티비를 보고 영화를 보려다가 갑자기 피곤해져서 자려고 누웠다. 오늘은 일기를 쓰기가 너무 귀찮다. 

헷갈려. 어느 것이 꿈이었는지 실제였는지. 벌써 세시가 되어버렸다. 오늘은 하루가 참 길다. 비도 추적추적 오고 많이 늘어진 날 같다. 먼 날 같다. 




금요일, 5월 14, 2021

two songs of a fool

오늘은 하루종일 바보를 생각했다. 내가 왜 그동안 예이츠를 읽지 않았을까? 어쩌면 지금 만난 것이 운명일지도 모르겠다. 예이츠가 이렇게도 초월적인 것들을 연구하던 사람인 줄 몰랐다. 마야력에 의하면 12일부터 채널의 날이 시작되었는데, 정말 계속해서 동시성을 느끼고 있다. 다시 모든 자연에 감응하게 해주세요.

바삐 단서들을 찾아다니느라 말을 할 정신도 없을 정도이다. 정신을 종잡을 수 없는 바보가 되고 싶다. 뿔피리의 달콤한 선율과 사냥개의 이빨을 마주칠 수 있는 곳에서.

예이츠의 시를 읽고, 예이츠의 '바보'가 의미하는 바에 대해 연구하고 있는 논문을 읽었다. 그가 나눈 달의 위상과 그에 따른 인간의 성격들 중에서도 바보는 도를 깨우치는 단계에 있는 거의 도인이나 마찬가지인 존재였다. 며칠 전 본 이란의 60년 동안 씻지 않은 할아버지가 생각이 났다. 네오. X. 성경에 나오는 짐을 거부하는 당나귀. 갈색 산토끼. 시에 등장하는 이미지들과 예이츠가 설명하는 세상의 도에 대해서 읽다가 산토끼에 푹 빠져서 산토끼를 열심히 검색했다. hare라는 단어도 오늘 알았다. 그러다가 뒤러가 그린 산토끼를 발견했다. 도대체 그는 그리지 않은 것이 뭘까. 뒤러의 너무나도 사랑스러운 산토끼를 저장하고.. 계속 바라보았다.

산토끼를 보다가 또 발견한 것은, 세 토끼라는 오래된 상징이다. 원형으로 달리는 세 토끼가 그려져 있는데 각자 두 개의 귀 중 하나는 다른 토끼와 공유하고 있다. 그래서 사실상 그 상징에서 귀는 총 세 개가 된다. 토끼 셋과 귀 셋. 불교, 이슬람, 기독교 등 거의 모든 종교와 문화에서 발견된 상징이라 더 신기하다(뒤러의 그림 중에 세 토끼가 등장하는 것이 또 있었다...). 켈트족의 트리퀘트라와도 연결할 수 있는 상징이다. 그리고 이 상징들은 다시 labyrinth로. 신기하게 멀리 떨어진 각각의 문명에서 상징하는 것들이 결국에는 하나로 모이곤 한다. 또다시 전체론적 바보.. 전체론적 미궁...! 

목요일, 5월 13, 2021

labyrinth

고도에 다녀왔다. 너무 맛있는 정은씨의 다쿠아즈... 커피와 오렌지주스도 마시고 바스크 치즈케이크도 먹고 우리는 아주 만족스런 오후를 보냈다. 아, 날씨는 거의 여름이었다. 아직 도시에 열기가 쌓이지 않아서 시간이 좀 지나면 시원해지지만, 한여름이 오면 아스팔트가 뿜어내는 그 열기를 어떻게 견딜까 걱정이다. 미스트랄이 간절해질 것이다. 그래도 해가 길어지고, 날이 좋아지니 기분이 훨씬 좋아졌다. 이제야 사는 것 같다. 세상은 이제 초록색으로 뒤덮였다. 모든 것이 살아있는 것 같다. 초록색 잎사귀에 투명하게 내리쬐는 햇살이 아름다워서 길을 걸으면서도 이리저리 고개를 돌리며 구경하느라 바쁘다. 집에 돌아와서는 이전에 했던 타투들을 리터치했다. 내가 서툴게 한 첫 번째 타투와 오지가 그려준 종려나무도 더 선명해졌고, 내가 그린 작은 엑스들과 손톱 아래에 장식을 다시 작업했다. 그렇게 오후를 보내고, 밥을 먹고 다래끼약도 챙겨 먹고, 계속 미궁에 대해서 찾아보고 있다. 타투를 하고 싶어서 찾던 문양들 중에 고대 유적에서 종종 발견되는 labyrinth들의 형태에 사로잡혔다. 그것이 탄생, 윤회와 같은 규칙, 이치들을 의미한다는 것도 처음 알았다. 노션에다가 열심히 자료들을 쌓고 있다. 내 작업 정리도 여기다가 하려고 한다. 나름의 작업 노트가 될 수 있겠다. 하루종일 이 작업에 그제부터 열중하다 보니 다시 머리가 열리는 것 같다. 집중하여 보고 싶은 이야기들이 많아졌다. 생기가 생긴 것 같아서 참 행복하고 다행이다. 작업하고 연구하는 삶이 내게는 가장 중요하다. 그것만으로도 내가 살아간다고 말해도 될까.

지금 오지가 마야문명의 상징에 관한 책을 보다가 신기한 것을 알려주었다. 오지 생일을 마야 달력으로 표시했을 때와 내 생일을 표시할 때 숫자가 같다. 12.

9월 18일

1월 8일

이미 아라비아 숫자로 표기했을 때도 연관성이 보이지만, 마야 숫자 체계에서는 같은 모양이니 신기하다. 


매번 느끼는 거지만, 절대 나아지지 않을 것 같던 것들도 나아진다. 내가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느껴졌지만, 그래도 오늘도 재미있는 것들을 많이 찾아내고 나니 기분이 좋다. 마음은 잠도 자지 않고 연구에 열중하고 싶지만, 이제 졸음을 잘 참을 수가 없다. 다행인 건지..!
꿈은 여전히 많이 꾼다. 오늘 꿈은 기록을 해놓지 않아서 그런지 가물가물하다. 꿈을 이렇게 많이 꾸는 것도.. 의식의 문이 열려있는 것이라고 했으니 어쩌면 이번 주에 들어 더 나의 의식의 문이 열리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수요일, 5월 12, 2021

경신일

일기를 쓰다가 백스페이스를 누른 채로 졸았는지 다 지워져있다. 이것이 오늘 나의 메시지인가. 자야지 오늘은.

눈병과 피자
체스보드
뼈다귀와 나뭇가지들 그리고 뱀
도자기 친구들


화요일, 5월 11, 2021

계절이 이동하는 때

폭신한 이불을 빨았다. 이제 장롱으로 들어간다. 드디어 계절이 이동한다. 정확하게 그것을 느끼는 날이 되어서야 내 침구와 집을 바꾸는 일을 시작하게 된 것 같다. 오늘 은이언니를 만났다. 평내호평에 처음 가보았다. 우리 집에서 두 시간 거리. 은이언니가 어릴 적부터 살던 동네에서 밥을 먹고 디저트와 커피를 사서 언니네 집엘 갔다. 아파트에 가는 것도 오랜만이었다. 우리 예전에 살던 현대우성아파트가 생각났다. 내일모레 이사를 한다고 하여 집에 짐과 잡동사니가 가득했다. 언니는 대학 시절에 쓰던 암실 장비들을 내게 챙겨주었다. 전부터 내게 챙겨가라며 연락이 와서 오늘에서야 내가 드디어 언니 집에 방문을 한 것이다. 이사를 떠나기 전이라 다행히 내가 조금이라도 짐을 더는 데 도움이 되었기를.. 정말 많은 장비들을 언니가 챙겨줬다. 갖가지 장비가 많았다. 정말 언니는 암실 작업을 사랑하는 사람이었던 것 같다. 그 시간과 애정이 담긴 물건들을 받아오니 나는 부자가 된 것 같다. 역시 오덕이 최고야. 오랜만에 풍족함을 느껴본 것 같다. 그러고 보니 오늘은 맛있는 음식도 많이 먹었네. 언니랑 나는 오랜만에 만났는데도 그대로였다. 이상하게 항상 그렇다. 몇 년 만에 만나도 똑같은 우리들. 배가 한참 동안 불렀다. 집에 와서 잔뜩 챙겨온 장비들을 오지에게 자랑하고 오지가 시킨 피자를 함께 먹었다. 나는 배가 별로 고프지 않아 한 조각만 먹었는데 지금은 배에서 천둥소리가 난다. 그도 그럴 것이 어제 하던 작업을 마저 이어서 하려니 오지가 옷장을 정리하자고 했고 우리는 새벽 한 시가 되도록 정리를 했다. 기부할 것들과 장터에 나가서 판매할 것들, 인스타 마켓에서 판매할 것들. 큰 할 일을 정리했다. 그리고 또 해야 할 일들이 많아졌다. 오지와 나는 거의 옷을 함께 입기 때문에 옷에 담긴 사연들도 잘 알고 있다. 오늘 옷들을 정리하고 가장 큰 목표였던..정말 오래되고 낡은 옷들을 처분하는 것..을 하면서 떠드느라 한참을 웃고 그랬다. 이상하게 너무 즐겁고 재밌는 작업이었다. 우리가 오랜만에 함께 신나게 웃고 떠든 것 같네. 귀여운 내 동생 오지은. 웃긴 것은 그런 와중에도 정말 낡아 거의 투명할 정도로 얇아진 옷들 몇 개는 영원히 간직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애착 옷이라고 부른다. 내 하늘색 셔츠는 정말이지 언젠가 사라져버릴 것 같다. 절대 버리지 못하는 것. 웃기다. 이것 외에도 나는 아마 정리할 것이 참 많을 텐데 무얼 어떻게 하면 좋을까. 콤팩트한 살림살이 만들기. 처녀자리의 올해 숙제. 아 해야 할 일들은 산더미네. 오늘 그래도 내가 오지와 함께 정리를 했다는 사실에 조금 놀랐다. 많이 내가 괜찮아 진 걸까. 그런 면에서 나를 좀 칭찬해도 되려나. 사실 뭐 나 자신을 칭찬하는 일은 거의 없지만 오늘 은이언니가 했던 말이 생각나서 그런다. 자기 자신을 칭찬하는 글을 써야 하는 숙제가 있었는데 하나도 쓰질 못했다는 이야기. 나는 그래서 오늘 옷 정리를 한 나를 칭찬해보면 어떨까 했다. 사실 도중에는 참 자책하고 부끄러운 순간도 많았지만서도 말이다. 요즘 피곤해서 그런 걸까 무엇 때문일까 다래끼가 나려는 징조가 보인다. 왼쪽 눈 눈꺼풀이 욱신거린다. 요즘 꿈에 시달리다시피 많이 꾸고 많이 잠에서 깬다. 오늘은 연쇄살인범이 등장했다. 정말 많은 사람을 죽이고 아무렇지 않게 잘 살던 남자. 아내와 아이도 죽였다 나중엔. 그 연쇄살인범을 찾기 위해 내가 내 파트너와 엄청 열심히 뛰어다녔다. 오늘은 도대체 어떤 꿈을 꿀까.

월요일, 5월 10, 2021

endless tide

꿈을 엄청 많이 꿨다. 깨어나면 세상은 회색빛이었다. 날씨가 그래서 그런지 잠이 계속 오는 날이었다. 자도 자도 잠이 왔다. 

망우리 골목을 윤슬이와 걸었다. 우리집으로 데려가고 있었다. 세상적인 가치를 추구하는 나와 도를 깨우친 나 사이의 간극으로 인해 끊임없이 투쟁의 삶을 살고 있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이 갈등이 프랑스를 다녀온 이후에 더 심해져서 정말 이렇게 괴롭다간 미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고 윤슬이에게 내가 말했다. 거듭. 미친다는게 뭔지 알겠더라고 하면서. 계속 이 이야기를 하며 가다가 골목길을 꺾어 우리집 대문이 나왔다. 두 사람이 그곳을 기웃거리고 있다가 우리가 와서 황급히 떠나갔다. 나는 순간 그들이 고양이들을 찾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마침 내가 대문을 여니 두 고양이가 대문을 향해 오고 있었다. 아니 한 고양이는 다른 한 고양이 등에 업혀 있었다 완전히. 나는 떠나고 있던 그 두 사람을 불러서 '여기 보세요, 고양이들이 있어요' 하니 그들은 다가와서 고양이를 보았다. 우리도 함께 보려고 대문 밖에 나갔는데 그 두 고양이 주변에 아기 고양이들이 한 네다섯 명이 있었다. 무늬는 검은색 흰색이 섞여있는 고양이들이었다. 그 큰 두 고양이들 중에 하나가 그런 무늬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물려받은 것 같았다. 그런데 어떤 아이는 흰색이 더 많았고, 순서대로 조금씩 검은색 무늬가 커지듯이 무늬가 아이들 사이에서 커진 것 같았다. 다른 어떤 아이는 온 몸이 검은 색이었다.




너무 여러가지 꿈을 꾸느라 정신이 없었다. 그러다가 일어나 까미유를 병원에 데려갔다. 예방접종을 더 맞아야할 것이 있어서 주사도 맞고, 구충제도 받으러 간 것이다. 까미유는 마지막으로 병원을 들렀을 때보다 2배가 커져있었다. 선생님은 놀랐다. 까미유는 5kg가 되었다. 얼굴도 작고 골격이 크지 않으니 이보다 이제 더 살이 쪄서는 안된다고 하셨다. 우리는 선생님께 현실적이고 의학적인 조언을 듣고는 다시 제한급식을 실시하기로 했다. 두 시간씩마다 밥을 주기로 했다. 의외로 까미유는 이제 그 때만큼 밥에 집착하지 않는 것 같다. 지금 봐선 그렇다. 왠일일까. 우리 까미유. 까미유는 이빨로 무는 것이 습관이 되었다며 선생님께서 걱정을 하셨다. 초장에 호되게 혼을 냈어야 했는데 이미 습관이 되어버린 까미유. 지금이라도 호되게 반응해줘야겠다.
주사를 맞고 약을 받고 우리는 김밥을 사서 집에 돌아왔다. 김밥을 열심히 먹고 나는 또 너무 피곤해서 미셸과 함께 졸았다. 그러다가 크로플과 커피를 먹자고 졸라대는 오지의 목소리에 결국 겨우 일어나서 커피 타임을 가졌다. 그리고 나서 조금 쉬다가 저녁 때가 되어 겨우 뭔가를 끄적이기 시작했다. 오늘 알게된 플랫폼 하나가 있는데 거기서 나만의 페이지를 만들어 그 안에서 백과사전같은 걸 만들고 있는 중이다. 작업에 필요한 자료들을 여기에다가 열심히 아카이빙 해두면 참 좋을 것 같다. 그래서 하루종일 오늘은 미로에 대한 자료들을 들춰봤다.
사실 미로는 타투를 하기 위해 여러가지 문양을 살펴보던 중에 발견한 것이다. 고대의 암석화에서 많이 발견되는 미로의 형태들이 나를 사로잡았다. 고대부터 시작해서 중세 기독교문화에까지 아주 다양한 지역에서 꾸준히 발견되고 있는데 미로는 그 자체로 명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것 같았다. 마치 만달라와 비슷한 것 같다. 신기하게 사람들은 왜 이렇게 다 똑같은 것들을 그리고 만들었을까. 결국엔 결코 끊어지지 않는 미로, 모두가 결국엔 만나는 미로 속에서 우리가 존재하는 것 같다. 인드라망같이. 거미줄 같이.
요즘 꿈을 살벌하게 꾸고 있어서 그런지 매우 피곤해진 것 같다. 내일은 약간 험난한 스케쥴이 예정되어 있다.. 부디 내일은 해가 반짝 떠 있기를. 

일요일, 5월 09, 2021

일요일

일을 하는 주말은 정말 너무 몸이 피곤하다. 그래서인지 집에 돌아오면 기분이 안좋은 것 같다. 오늘 저녁도 기분이 별로였다. 자고싶지 않은데 너무 잠이 온다. 그것조차 짜증이 난다. 
오늘은 참 날씨가 좋았다. 밖에 있는 사람들이 다 부러웠다. 내일도 맑았으면. 날씨가 어둡거나 미세먼지가 가득한 날에는 내 몸의 모든 구멍들도 막히는 느낌이 든다.
그리고 어제에 이어서 오늘도 안좋은 꿈을 꾸었다. 불길한 꿈. 이번에도 여행을 했다. 나는 캐리어를 공항 리무진에 태웠다. 이제 떠나려고 준비 중이었는데 여권이 사라졌고 모든 것이 사라진 것 같았다. 불안하고 불길한 이미지들이 계속 나왔고 색도 꾸리꾸리했다. 그저께 본 세상과 바슷한 느낌. 같은 차원일까. 새벽내내 뒤척였던 것 같다. 
내일은 새로 시작하는 마음으로 이불을 바꿔야지.

토요일, 5월 08, 2021

내가 두려워하는 것들과 친해지는 때. 5월을 보내고 있다. 그냥 그저 그런 하루를 보냈다. 일을 했고 집에 돌아와 과자를 먹고 원슈가 나오는 티비 프로그램을 시청하며 깔깔 웃어댔다. 너무나 사랑스러운 사람을 보고 있으면 행복하기도 불행하기도 하다.

작업할 주제와 제목들이 떠올라서 '그래, 이렇게 하는 거였지. 평생 이렇게 작업을 하며 살면 돼'라고 생각하며 갑자기 희망차게 저녁 시간을 보냈다. 그러다가 배가 좀 아프고 몸이 피곤해지더니 갑자기 불안이 찾아왔다. 다시금 나를 종종 괴롭히던 생각의 고리들이 생겨나고 있었다. 할 말이 더 있는데 솔직하게 쓰는 것도 꺼려지는 밤이다. 그러다가 내가 두려워하는 것들과 친해지는 때가 5월이라고 알려준 칼리의 말이 생각났다. 피하지 말라고 했는데.. 모르겠다. 자고 일어나면 나아질까. 잠이 쏟아진다.

금요일, 5월 07, 2021

어둡고 약간 불안한 꿈을 꾸었다. 알 수 없는 이슬람 국가에서 회사에 다녔다. 회사에서 주는 밥은 정말 맛이 없었다. 고무를 씹는 맛이 났다. 먹으면 안 되는 장식품을 먹었다. 나중에는 많은 사람과 친구가 되었다. 어느새 배경은 베를린으로 바뀌어 있었다. 나는 베를린 사람들과 친구가 되었는데 모두 한국어를 할 줄 알아서 우리는 한국어로 대화를 했다. 한국으로 돌아가야 하는 날이 되었다. 비행기를 놓쳤다. 이렇게 된 김에 그냥 여기에서 죽 체류하면서 지낼까. 비자는 없지만, 그냥 불법체류를 하면서 지내는 거야 아니면 그냥 한국에 돌아갈까 고민을 했다. 한국에서 알던 친구 한 명이 베를린에서 살고 있었고, 나는 급하게 그의 집에서 하룻밤 신세를 지기로 했다. 그러나 그 집에서 나는 약간 꿔다놓은 보릿자루 같았다.

깨어나니 비가 억세게 오고 있었다. 그래서일까 계속 자고 싶었다. 늦장을 부리다가 천천히 일어나서 김밥을 시켜 먹었다. 오지는 오늘 타투 손님이 오기로 했다. 나는 오늘은 종일 작업을 할 생각이었기에 카페에 가려고 집을 나섰다. 나오자마자 뿌연 세상에 놀랐다. 정말 미세먼지가 심한 날이었다. 놀라울 정도로 하얀 세상이었다. 먼지를 뚫고 집에서 가까운 카페에 갔다. 요즘 자주 찾는 개인주의라는 카페다. 커피를 마시며 작업을 시작했다. 차분한 공간이라 그런지 집중이 잘되었다. 이 카페에서 주는 커피를 마시면 정신이 바짝 든다. 말끔해진 머리로 말들을 만들어냈다. 요즘 내 작업에 대해서 더 자세하게 그리고 더 면밀하게 이해하고 설명하고자 노력 중이다. 오늘은 조금 진전이 있었다. 집에서 작업하는 것이 가끔 힘들면 이렇게 나와서 작업을 해야겠다.

저녁 시간이 되기 전에 집에 돌아왔다. 하던 작업을 마저 내 책상에서 이어갔다. 오늘은 어글리어스에서 채소 박스가 오는 날이다. 채소 박스를 받아서 오늘 받은 감자와 조금 남은 애호박으로 간단한 반찬을 만들고, 어제 만든 요리를 동생과 나누어 먹었다. 식사를 챙겨 먹는 일도 요즘은 조금 소홀했다. 다시 조금 열정을 찾고 싶다.

밥을 먹고 하던 작업을 조금 더 정리했다. 그러다가 현재는 5년 전과 같은 패턴을 가지고 있다고 한 칼리의 말이 생각이 나서 5년 전 오늘을 찾아보았다. 나는 스튜디오를 다니던 시절이었고, 준혁이 사진이 좀 많았다. 그저께 다시 오랜만에 준혁이를 만났는데 그때의 인연들을 또 만나게 되는 것 같아서 신기하다. 나래 언니 촬영을 위해 시안을 찾다 보니 인물사진을 찍는 것에 갑자기 흥미가 느껴져서 웨딩 촬영이 끝나고 나면 개인 작업을 해볼까 하고 있다. 좋아하는 얼굴들을 불러서 함께 하고 싶다. 나만의 방식으로. 나는 5년 전보다 조금 더 내가 하는 일에 익숙해졌을 거야. 사실은 언제나 자신이 없지만 그렇게 믿고 있다. 그리고 또 5년이 지나면 나는 더 나아져 있겠지. 궁금해.

갑자기 작업하고 연구하는 사이클이 돌아온 것 같아서 기분이 좋다. 내일 일하러 가야 하는 것이 아쉬울 정도다. 히토 슈타이얼 책을 좀 보다가 잠들어야지. 

목요일, 5월 06, 2021

일어나 밥을 먹고 청소를 했다. 할 일이 많은데 몸은 힘들고 느리고.. 청소하고 나선 나래 언니 웨딩 촬영을 위해 시안을 열심히 찾아보았다. 오랜만에 화보들 들여다보고 있으니까 재밌었다. 그런 작업도 꽤 재미있는 것 같다. 스튜디오를 나와서는 패션 화보를 들여다보지 않게 되었는데, 다시 종종 들여다볼 생각이다. 요즘 머리를 너무 바꾸고 싶어서 어제 하고 싶은 스타일을 골라놨다. 오늘 오지가 예전에 다녀왔던 미용실에 예약했다. 오랜만에 숏컷으로 돌아왔다. 목덜미가 가볍고 시원하다. 집에 돌아오는 길은 서늘했다. 집에 돌아와선 냉장고에 남아있는 채소들을 정리하기 위해 요리를 했다. 야채 덮밥을 해 먹고, 아까 합정역에서 빵집에 들러 사 온 시나몬 롤을 두유와 함께 먹었다. 생각보다 너무 맛있었다. 그리고 나선 계속 졸고 있는 중이다. 집에 돌아와서 작업이든 뭐든 하고 싶었는데 어제 좀 힘들었는지 졸리고 피곤하다. 실은 일기도 건너뛸까 하다가 무릎 위에 있는 노트북을 다시 열고 일기를 쓴다. 

오늘도 강한 꿈을 꾸었는데, 깨어나 적으려다 다시 잠들었고 이제 기억이 나질 않는다. 고양이를 꺼안고 자야지. 우리가 서로 닿아있을 때 나는 우리가 같은 꿈을 꾼다는 생각을 한다. 

수요일, 5월 05, 2021

영원과 하루

꿈에서부터 이미 시작되는 하루.

불교 의식을 했다. 나는 유황에 나뭇가지 끝부분을 몇 초간 담갔다가 꺼내어 내 주변을 감싸듯이 빙빙 돌렸다. 그 연기가 나를 감쌌다. 아주 빠르게 탔다. 내 옆에는 친구들이 있었다. 모두가 각자의 자리에서 기도를 드리고 있었다. 빠르게 타들어 가는 그 향이 마지막에는 거의 불꽃으로 변했다. 그때 주변에 있던 휴대용 가스레인지에 불꽃이 튀겨 부풀어 올랐고, 폭발할까 봐 모두가 고개를 숙이고 숨었다. 다행히 폭발은 일어나지 않았다. 기도하던 중에, 잠깐 나는 아주 인간적인 마음으로 무언가를 소망했는데, 그 때문에 갑자기 그 불꽃이 튀어 위험해진 것 같아서 아주 뜨끔했다. 다시 집으로 돌아가 정돈을 하고 기도하기로 마음먹었다.

robert gigs

잠결에 꿈을 메모해두었다. 로버트 긱스라는 이름의 유명 작가가 나왔다. 검색해보니 그런 작가는 없는 것 같다. 저 이름은 어디에서 나온 것일까.

일찍 일어나 누워 있었고, 오지도 이내 곧 일어나 꿈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꿈에서 나온 노래를 알고 싶다고 했다. 오지가 허밍으로 부르는 멜로디를 나는 전혀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갈피를 잡을 수도 없어서 수많은 곡을 재생하며 꿈속의 노래를 찾고 있었다. 그렇게 오전을 다 보내고, 갑자기 약간은 허무하게 노래를 찾아냈다. 내가 너무나도 잘 알고, 너무나도 좋아하는 프로콜 하럼의 a white shade of pale이었다.

그리곤 급히 옷 수선을 떨다가 이안이네 집으로 향했다. 우리는 지난번에 가려고 했다가 실패한 승가사를 가보기로 했다. 차로 갈 수 있다는 이야기를 어딘가에서 들었던 터라, 우리도 이안이 차를 타고 갈 수 있겠지 하는 생각에 자신 있게 길을 찾아 나섰다.

산을 오르는 입구에 도착하자 차를 끌고 갈 수 있는 길은 사라졌다. 우리는 우왕좌왕하다가 지나가던 등산객 아저씨께 여쭤봤다. 알려주신 곳으로 가니 오늘은 승가사로 올라가는 셔틀이 운행하지 않는다고. 일반 승용차는 올라갈 수가 없다고 했다. 우리가 그럼 걸어가겠다고 하자 포기하라고 말씀하시는 주차관리인 아저씨. 너무 웃겼다. 포기하라니. 하지만 우리는 우리 멋대로 길을 찾아 나섰다. 전에 갔던 혜림정사 옆에 승가사를 향하는 길이 있었기 때문에 다시 혜림정사를 찾았다. 승가사라고 쓰인 표지판이 있는 길로 들어섰다. 그 길은 울퉁불퉁하긴 하지만 차가 올라갈 수 있는 길이긴 했다. 하지만 아주 가파른 길이었다. 일반 등산객들은 그 길을 그냥 죽 걸어 올라가면 되는 것이었다. 인터넷에 찾아보니 약 35분 정도 시간이 걸린다고 했다. 정말 조금 걷다가 이건 무리일까 하는 생각이 사실 들긴 했다. 우리에게 포기하라고 했던 아저씨가 맞는 것 같았다. 지나가는 차가 있었으면 좋겠다는 헛된 희망을 가지고 있던 우리들은 정말 짜인 각본처럼 갑자기 뒤에서 차가 오는 소릴 들었다. 파란색 트럭이 오고 있었다. 이안이는 트럭을 세워 승가사에 가는 우리를 태워달라고 부탁했다. 아저씨는 아주 흔쾌히 우리를 태워주셨다. 아마 승가사에서 공사를 하시는 아저씨인 것 같았다. 이안이는 아저씨와 앞에 타고, 나와 오지는 트럭 뒤에 탔다. 일하는데 쓰시는 트럭이라 그런지 트럭에는 흙이 아주 많았다. 우리 옷은 흙으로 뒤덮였다. 길이 정말 울퉁불퉁하고 가파르기 때문에 우리는 계속 들썩들썩 각자 옆에 있는 밧줄과 공구를 손잡이 삼아 잡고 몸을 가누었다. 오지와 나는 계속 웃었다. 서로의 우스꽝스러운 모습을 보면서, 이 모든 상황을 보면서. 아주 가끔씩 지나가는 사람들이 우리를 신기하게 쳐다보았고, 가는 길 도중엔 포크레인을 마주쳐서 잠시 정차해야 하는 상황도 일어났다. 이윽고 산 중턱에 멋지게 자리하고 있는 승가사에 도착했다. 드디어.. 항상 이상하고 재미있는 일들이 우리에게 다가오는 것 같았다.

승가사 구층석탑 앞에 도착한 우리들. 뒤에는 죽 펼쳐진 푸른 산의 풍경이 그리고 멀리 도시의 풍경이 펼쳐져 있었다. 계속 우리는 감탄만 했다. 승가사에 도착했던 때는 이미 오후 5시쯤이었던 터라 사람이 하나도 없었다. 비구니 스님들 두 분만 마주쳤다. 승가사를 살펴보려면 계속 오르막길 혹은 계단을 이용해야 한다. 아주 높은 절이다. 그리고 우리 앞에 108계단이 나타났다. 108계단 끝에는 커다란 절벽 바위에 마애석가여래좌상이 새겨져 있었다. 나는 기도하는 마음으로 108계단을 올랐다. 오늘 꿈을 생각했다. 내가 꿈에서 너무나 인간적인 기도를 해서 벌을 받는 것 같다고 느꼈던 것이 생각났다. 나는 아주 간단하게 기도를 하며 올라갔다. 호오포노포노명상을 하는 것처럼. 계단을 모두 올라가자 우리는 정말 제일 높은 곳에 있는 것 같았다. 너무 멋진 풍경이 한눈에 들어왔다. 서울에 이렇게 커다란 산이, 그리고 커다란 산에 있는 사찰이 있다는 것이 새삼 놀라웠다. 이렇게도 아름답고 멋진 사찰이 있다니. 우리는 아주 평안했다. 마애여래좌상 앞에서 우리는 손을 모아 기도했다.

저녁이 금방 다가오고 있었기 때문에 우리는 서둘러 내려가야 했다. 도중에 승가사 곳곳을 더 들르긴 했지만 말이다. 우리는 트럭을 타고 올라왔던 그 길을 걸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우리는 내려가는 내내 노래를 불러댔다. 새소리를 내고 싶었다. 해는 많이 내려왔고 거의 우리와 멀지 않은 것 같은 높이에 있었다. 옆에 보이는 봉우리에 해가 가까웠다. 가까운 그 해가 비추는 세상은 정말이지 축복을 받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우리는 내려가는 길에 몇 번이나 멈추어 햇살이 주는 축복을 받고, 감사해했다. 햇살을 투명하게 받아들이는 초록색 잎들과 우리의 말간 얼굴들. 너무 오랜만에 느껴보는 축복이었다. 그렇게 천천히 가파른 길을 내려왔다.

지친 우리들은 다시 도시로 내려와 칼국수를 먹었다. 식사를 마친 뒤엔 이안이네 집에 가서 오늘 있었던 일들을 돌이키며 한참을 웃고, 서로의 사진과 영상을 공유했다. 정말 정말 많이 웃었다 우리는. 이안이 집에 편히 앉아 티비도 보고, 디저트도 먹고, 떠들다가 늦은 밤이 되어 집에 돌아왔다. 아이들은 오늘 무얼 했나. 그러고 보니 우리 아이들에게는 어린이날을 축하해주지 않았네. 도리어 우리가 어린이가 되어 하루종일 놀았구나. 우리보다 고양이들이 더 어른스러운 것 같다. 미셸은 오늘 내 냄새를 많이 맡았다. 내가 가만히 바닥에 엎드려 있었거든.



꿈으로 시작하여 꿈으로 끝나는 하루. 승가사에서 보았던 그림. 집에서 다시 이 그림을 보니, 이건 오늘 내 꿈의 장면이다. 향을 들고 있는 나. 내 옆에서 기도하고 있는 친구. 이미 보았던 하루. 이미 살았던 하루. 연등에 붙어있는 극락왕생이라는 말이 계속 생각났다. 계속 다시 살아나는 우리들. 우리는 수천 번을 죽고 다시 살아난다. 그리고 햇살이 얼굴에 드리울 때마다 극락을 경험한다. 오늘은 영원과 하루.




화요일, 5월 04, 2021

쭈글쭈글

일찍 눈을 떴다.

오늘은 하루 종일 비가 오는 날.

병원에 다녀왔다. 작은 전시(전시라고 불러도 될까 가끔 생각하긴 하지만..)를 짧게나마 하고 나니 빨리 나만의 전시를 하고 싶어졌다. 오프닝을 재밌고 멋지게 하는 상상을 했다. 나중에 내 전시를 하게 되면 오프닝에 선생님도 초대해야지. 계속 그 생각을 하다가 오늘 선생님께 초대해도 되냐고 물어보니까 괜찮다고 하셨다. 이상하게 그다지 이야기를 나누지는 않은 것 같은데 선생님이 좋다. 알게 모르게 내 생활 속에도 의지가 되는 구석이 하나 생긴 것 같다. 사실은 큰 의미를 가지지 않지만, 내가 스스로 그렇게 만든 것일 수도. 아무렴. 그렇게 여긴다는 것이 중한 것이겠지.

집에 돌아오는 길에 버스 정류장을 잘못 내려서 한참 걸어서 집에 도착했다. 홍제천에 풀들이 정말 많이 자라있었다. 이미 풍경은 여름에 가까워졌다. 그 우거진 물가가 나는 참 마음에 든다. 집에 돌아와선 어제 나래 언니가 사준 도넛을 먹고 이내 곧 나왔다.

정말 오랜만에 준혁이를 만났다. 어제 갑작스럽게 잡은 약속이다. 오늘 둘 다 별다른 스케쥴이 없어서 준혁이가 우리 동네로 오기로 했다. 나에게 물어보고 싶은 것도 있다고 하면서. 보자마자 준혁이는 나를 놀리고 나는 혼내고 그대로였다. 준혁이는 요즘 생각하고 있는 작업 주제에 대해서 이야기해주었다. 개인 작업을 하고 싶은데 무엇을 어떻게 하면 좋을지 고민이 많았나 보다. 같이 하나씩 고민하고 조금씩 풀어나갔다. 준혁이는 무언가를 말로 표현하는 것에 대해서 어려움을 느끼고 있었는데, 준혁이에게도 일기 쓰기가 필요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준혁이에게 일기를 써보라고 권했다. 내가 요즘 매일 밤 일기를 쓰고 있는데, 내 하루를 반추하며, 감사할 것들이 생기기도 하고, 무언가를 더욱 세심하게 기억할 수 있어 좋다고. 준혁이는 자신에게 지금 꼭 필요한 것 같다며 해보겠다고 했다. 준혁이도 요즘 약간 의욕이 많이 떨어져 있던 것 같은데, 오늘 이야기를 하면서 해야 할 것들을 함께 정리한 것 같았다. 자주 와서 같이 작업도 하기로 했다. 준혁이가 오늘 일기를 썼을까? 궁금하다.

우리가 한참 이야기하고 있으니까 그쳤던 비가 다시 억세게 오기 시작했다. 준혁이는 갔고, 나는 집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비는 종일 왔다. 집에 돌아와선 오지와 영화를 보고 싶었는데, 조금 누워있다 보니 배가 많이 고파서 짜장라면을 끓여 먹었다. 그러고 나서 해야 할 일들을 좀 해보려고 책상에 앉았는데, 우연히 유튜브에서 본 클립으로 인해 우리는 정호근 아저씨가 나오는 영상들을 계속 보게 되었다. 그의 생애 이야기, 무당이 된 사연을 보니 너무나 신기하고, 모든 것이 이해가 갔다. 할머니는 만신이었고, 누나들도 모두 신을 받았다고 한다. 그가 신내림을 받지 않아서 생겼던 가슴 아픈 일들. 가장 사랑하는 것을 잃어야 하는 아픔. 참 신의 섭리는, 인간이 보기에는 이해하기 힘들 때가 많다. 그런데 정호근 아저씨는 이제 그것들을 다 진심으로 이해하고 받아들인 영혼처럼 보였다. 사실 그가 무당이 되었다고 했을 때에, 놀라우면서도 믿어지지 않았는데 오늘 그가 무당으로서 신의 메시지를 사람들에게 전하는 모습을 보니 신기하고 감동적이었다. 오지와 나는 저녁 내내 그 영상들을 보면서 시간을 보냈다. 나를 보면 정호근 아저씨가 무어라고 할까 너무 궁금해졌다. 나의 주변에도 나를 지켜주는 누군가가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기도를 많이 해야겠다.

그러고나니 밤이 되었고, 씻으니 자야 할 시간이 되어버렸다. 벌써. 오지는 갑자기 작업하는 방에 있던 가구 하나를 자는 방으로 옮겼다. 우리의 방들은 계속해서 조금씩 바뀌고, 물건들은 계속 이동한다. 조만간에 집에 있는 쓰지 않는 물건들과 옷들을 한바탕 정리해야 한다. 모두 정리하고 가벼워지고 싶다. 비움이라는 것에 대해서 사실 깊이 생각한 적이 없다. 항상 쌓으면서 의미를 찾는 편이었기에. 나는 꽉 찬 책상, 꽉 찬 방, 꽉 찬 사진첩 속에서 더 안심할 수 있었던 것 같다. 오지와 나는 스스로를 맥시멀리스트라고 불렀다. 그런데 올해 사마리아가 처녀자리 운세에 대해서 말해 준 것은 모든 것들을 다 정리하고, 아주 가볍게 언제든지 떠날 수 있는 준비를 해야한다고 거듭 강조했던게 계속 떠오른다. 나도 비우는 것을 알아가는 시간이 된 걸까. 채우고 비우고. 일기를 쓰는 것도 어찌보면 비우는 일이 아닐까. 속에 쌓여있는 말들을 비우는 것. 데이터는 쌓이지만 말이다. 오늘처럼 선생님을 만난 날도. 그러고보니 참 재미있는 작업이구나 모두.

이상하게 뱃속도 하루종일 비어진 느낌이다. 배가 계속 고프네. 이것은 생의 의지겠지. 생의 의지는 말로 뱉어질 때에 배가 되고, 마음 속에서는 자주 수그러든다. 쭈글쭈글한 나의 생의 의지. 쭈글쭈글한 모두의 생. 재미있네. 

월요일, 5월 03, 2021

오늘은 많이 지쳤다. 전시를 철수하고 집에 돌아와 옷가지들과 모든 짐을 퍼뜨려놓고 쉬는 중이다. 그래서인지 일기를 쓰는 것도 귀찮다. 네이버 블로그에도 일기를 매일 올리는 중이라 오늘은 전시를 철수하며 찍은 사진들을 올리고 일기를 썼다. 사실 약간은 억지로 쓴 일기라 카레닌의 미소에는 옮기지 않을 참이다.

나래언니를 만났다. 우리가 작년에 만나고 올해에 처음 만난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았다. 그렇게나 시간이 훌쩍 지났다니. 나래언니의 웨딩사진을 내가 찍어주기로 해서 오늘 만나 이런저런 계획을 함께 짰다. 다행히 내가 보여준 스튜디오와 우리 동네 골목을 언니가 너무 좋아해 줘서 수월하게 이야기를 마쳤다. 긴장도 되고 기대도 되고.. 재밌는 하루가 될 것 같다.

언니는 집을 보러 가야 해서 헤어지고 나는 다시 집에 돌아왔다. 오지는 열심히 핸드폰 게임 중이었다. 나도 자리에 철퍼덕 앉아 게임을 했다. 간단하고 별 볼 일 없는 게임 같지만 내 하루 중 약간의 낙이 되었다. 게임을 하다가 오지와 커다란 가방과 액자들을 감쌀 에어캡들을 들고 1984로 향했다. 사람들은 늦게까지 카페에 남아 작업을 하고 있었다. 그 사람들 틈에서 마지막으로 전시된 우리 작품들을 열심히 찍고 액자들을 내렸다. 사진들 중의 하나는 1984에 계속 남기로 했다. 빛찬씨가 참 고마운 제안을 해줘서 1984에서 계속 사람들이 오고 가며 볼 수 있는 곳에 전시되어, 마음에 드는 사람들은 구매도 할 수 있도록 하기로 했다.

내 사진이 내가 알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보여지는 일이 신기하고 재미있다. 아직은 작지만, 그 인연의 끈이 더 넓고 크게 퍼지는 상상을 해본다. 우리를 잇는 거미줄이 바다를 건너 길게 길게 이어지고, 겹쳐지고, 엉키기도 하고 그랬으면 좋겠다. 그러는 동안에 내 사진에는 얼마나 많은 새로운 이야기가 생겨날까. 이 일을 위해서라도 살아야겠다. 늘 잊고 마는 마음이지만.

일요일, 5월 02, 2021

고뇌하는 인간

오늘은 조금 일찍 일어나 일을 하러 가기 전에 빵도 먹었다. 처음 마이클 식당에서 일하기 시작할 때는 늘 더 일찍 일어나 밥을 챙겨 먹고 나가곤 했는데, 몇 달 전부터 근래까지는 거의 나가기 5분 전에 일어나는 생활에 익숙해져 있었다. 너무 피곤하고 잠을 참을 수가 없었다. 요즘 다시 조금씩 돌아가는 중이다. 일어나 다복이네가 준 딸기잼과 피넛버터를 발효빵에 발라 먹었다. 천상의 맛. 목이 막히는 맛. 그럼 저승의 맛인가.

오늘도 많이 바빴다. 어제랑 비슷하게 사람들이 밀려와 점심을 챙겨 먹으려던 우리는 점심시간이 훌쩍 지나고 좀 안정을 되찾을 즈음에 밥을 챙겨 먹었다. 마이클이 만든 가지볶음은 또 천상의 맛. 고된 노동 후에 먹는 밥은 더 꿀맛이다. 배가 차질 않아 조금 더 먹으려고 하자 사람들이 다시 밀려오기 시작했다. 밥을 입에 욱여넣고 다시 노동. 저녁에도 사람들이 좀 많이 와서 7시 30분까지 일했다. 마이클과 나무님께 딸기청을 선물하고 왔다. 마이클과 나무님에게 받는 것이 참 많은 것 같아서 무어라도 드리고 싶었는데 마침 양주에서 엄마의 딸기로 딸기청을 만들었다. 아주 맛있다. 마이클은 딸기 우유를 해 먹겠다며 좋아했다. 가끔 오늘처럼 오버타임으로 일을 하게 되면 마이클이 만 원씩 챙겨줄 때가 있다. 맛있는 거 사 먹으라며 만원을 내미는데 그게 참 기분이 좋고 참 귀엽다.

집에 돌아와서는 아이들 화장실을 청소해주고 바닥을 쓸고 밥을 먹고.. 씻고.. 오늘은 그렇게 특별할 것이 없는 날이다. 반추해 볼 것도 그다지 없는 날이다. 그저 그렇게 평범하게 지나간 하루. 다만 어젯밤에 보았던 사마리아의 유튜브 라이브에서 들었던 말을 계속 되뇌기는 했다. 나더러 고뇌하는 인간이라고 그랬다. 그러니 생긴 대로 살으라고. '고뇌 안 하면 병원에 가셔야 합니다', '하루 종일 고뇌를 하세요' 정말 너무 웃기고 슬픈데 어쩐지 위로가 되었다. 나는 고뇌하는 사람이다. 나는 고뇌하는 영혼이다.. 그렇게 살면 되는 것이래. 고뇌하면서.

내일이면 1984에 전시해놓은 사진들도 철수한다. 어느새 2주가 지났네. 그렇게 거미줄에 또 하나의 구슬이 맺히고 ~ 또 무엇일까. 우리 앞에 펼쳐진 시간은 ㅎ

토요일, 5월 01, 2021

지옥의 인사들

예전에 이미 한번 타노스와 싸워 이긴 적이 있었다.
다시 전쟁의 시대가 시작되었고 폭탄들이 하늘에서 떨어져서 수많은 사람이 죽었다.
동생과 아빠도 죽었다. 믿을 수 없었다.
나는 친구들을 구하고 살리기 위해 단서들을 찾고자 했다. 폭탄이 떨어진 자리들을 뒤지고 있었다.

내 등 뒤에는 타노스가 적어놓은 지옥의 인사들 이름이 있었다. 이름들이 가지치기하며 쓰여 있었다.
이상한 미로에 들어갔던 것 같다. 지옥 같은 구덩이가 있는 미로.
타노스를 속였다. 내가 그의 편인 척, 갖은 꿀 발린 소리를 해댔다.



어느 곳의 바다와 장소를 찾아서...

쿠키와 영혼의 나이

양주에 다녀와서 그런지 많이 피곤했나 보다. 아침에 일어나는 것이 조금 힘들었다. 겨우 눈을 뜨고 내 다리 이불 위에서 자는 미셸을 보았다. 자는 모습이 정말 천사같이 아름답고 사랑스러운 우리 미셸. 미셸을 살짝 안아주고 뽀뽀도 해준다. 곁을 떠날 수가 없었다. 정말 오늘따라 너무 미셸 곁에만 있고 싶었다. 또 겨우 일어나 나갈 채비를 했다. 일기예보를 보니 추운 날이다. 최고 기온이 14도밖에 되질 않았다. 무얼 입어야 할까. 평소에 잘 입지 않는 옷을 꺼내 들었다. 왠지 모르게 일하러 가는 날에는 잘 입지 않는 옷을 꺼내 입는다(오지는 저녁에 나를 보고 '또 이상한 옷을 입었네'라고 말했다).

날씨는 꽤 선선했다. 흐리고. 토요일과 일요일은 일주일 중에 내가 유일하게 루틴을 갖고 있는 날이다. 특이 사항이 있는 날(비가 오거나 눈이 오거나….)을 제외하고는 늘 자전거를 탄다. 오늘도 어김없이 따릉이를 타고 마이클 식당으로 달렸다. 대중교통을 이용하기엔 너무 복잡하다. 마을버스는 갈아타야하고, 일반 버스는 한참을 걸어가 배차 간격이 아주 긴 버스를 타야 한다. 놓치면 곤란해진다. 걷기에는 조금 멀다. 아무튼 자전거를 타고 가는 것이 제일이다. 주말마다 자전거를 타느라 평소에 운동을 많이 하지 않는 내가 그나마 근력을 지킬 수 있는 것 같다.

자전거를 세우고, 가게에 들어가 마이클에게 인사를 한다. 앞치마를 두르고, 손을 씻고, 오픈을 준비한다. 샐러드를 담고 피클을 담고 과일을 담고. 오늘은 날씨가 흐려서 사람들이 많이 오지 않을 것 같았다. 마이클도 나와 같은 생각이었나보다. 그런데 사람들이 하나둘씩 천천히 오더니 갑자기 비바람이 몰아치는데 사람들도 몰려왔다. 꽤 내내 바쁘게 일을 했다.

오늘은 그렇게 오후 내내 바쁘다가 금세 저녁 시간이 다가왔다. 오후 다섯 시가 되고부터는 여유로워졌다. 많이 조용해졌다. 쭉 그렇게 손님들이 드문드문 오다가 일곱 시가 되어 퇴근했다.

오늘은 절대 잊지 않겠다고 몇 번이고 되뇌었기 때문에 슈퍼에 들러 고추장을 살 수 있었다. 갑자기 쿠키가 너무 먹고 싶어서, 퇴근하기 전에 마이클에게 물어 (마이클은 나무 님에게 전화를 걸어 물었다) 망원동에 있는 맛있는 쿠키 가게를 찾았다. 찾아보니 평이 아주 좋았다. '주커'라는 곳이었다. 가게 앞까지 갔는데 문이 닫혀있었다. 왠지 예상했던 바였다. 헛걸음을 하고 너무 아쉬워서 파리바게뜨에 들어가 빵이랑 쿠키를 샀다. 쿠키는 너무 바삭했다. 나는 조금 촉촉한 쿠키가 먹고 싶었는데. 자전거를 타려고 하니 모두 다 비에 젖어있었다. 걸어가다가 마을버스를 타야겠다 하고는 길을 따라 걷는데 마을버스를 놓쳐버리고 그냥 집까지 걸어가기로 했다.

집에 걸어가는 길에 가끔 불어로 혼잣말을 한다. 불어를 다 까먹을까 봐 걱정이 되어 그런 혼잣말을 하곤 하는데 혼잣말이다 보니 할 말이 없어 이상한 말만 하다가 그만둔다. 그러다가 프랑스 노래를 들어야겠다 하고는 프랑스 음악을 이것저것 찾아서 들으며 걸었다. 내내 그렇게 새로운 노래들을 찾다가 집에 도착했다. 오지는 나보다 먼저 도착해있었다. 나는 도착하자마자 홀린 듯이 저녁 식사를 준비해서 밥을 먹었다. 적잖이 배가 고팠다.

오지는 나에게 오늘 갔던 전시에 대해서 열심히 이야기해 주었다. 사실 나도 꼭 가고 싶었던 전시였는데 (오컬트 마니아로서) 일하는 날이라 아쉽지만 포기했다. 우리가 너무나 좋아하는 아티스트이자 샤먼인 칼리가 오늘 사람들의 영혼의 나이를 알려주는 퍼포먼스를 하는 날이었다. 오지에게는 나이를 측정할 수 없다고 했단다. 굳이 측정하자면 지구의 나이. 그 이야기를 듣고 나는 오지가 마고 할미가 아닐까 생각했다. 안 그래도 오늘 오지가 함께 간 친구들도 모두 영혼의 나이가 많았는지, 칼리가 보고 할미들이 오셨다고 했단다. 너무 웃기다. 오래된 영혼의 내 친구들. 그래서 우리가 이렇게 다 모인 걸까. 그래서 다른 생에서도 이미 많이 만났던 우리들이 또 이생에서 만난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오지는 어렸을 때부터 이미 세상의 이치를 깨달은 영혼인 것처럼 보였는데 실제로 그런가 보다. 그래서 내가 항상 오지에게 랍비, 구루, 수녀님과 같은 별명을 붙여 부르곤 한다. 그런 오지와 자매인 나는 어떤 영혼을 가지고 있을까. 우리는 무슨 인연일까. 

내 얼굴을 보면 다른 것이 보일까. 오늘은 우리가 인연이 아니었지만, 조만간에 꼭 나도 칼리 님을 만나고 싶다. 꼭. 나와 나이도 같고, 칼리의 영상을 볼 때마다 깊이 공명하곤 하는데, 실제로 만나게 되면 어떨지, 칼리도 나를 보고 무언가를 느낄지 궁금하다.

오늘 일민미술관에 가는 것을 포기하고 마이클 식당에서 일한 것이 조금 아쉽기는 했지만, 이상하게도 오늘 그곳에 가지 않은 것이 나의 운명이었다는 생각이 계속 들었다. 이상하지만 오늘은 이것이 맞는 것 같았다. 그 이유가 무얼까. 이날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 그게 다음 우리의 만남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궁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