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찍 눈을 떴다.
오늘은 하루 종일 비가 오는 날.
병원에 다녀왔다. 작은 전시(전시라고 불러도 될까 가끔 생각하긴 하지만..)를 짧게나마 하고 나니 빨리 나만의 전시를 하고 싶어졌다. 오프닝을 재밌고 멋지게 하는 상상을 했다. 나중에 내 전시를 하게 되면 오프닝에 선생님도 초대해야지. 계속 그 생각을 하다가 오늘 선생님께 초대해도 되냐고 물어보니까 괜찮다고 하셨다. 이상하게 그다지 이야기를 나누지는 않은 것 같은데 선생님이 좋다. 알게 모르게 내 생활 속에도 의지가 되는 구석이 하나 생긴 것 같다. 사실은 큰 의미를 가지지 않지만, 내가 스스로 그렇게 만든 것일 수도. 아무렴. 그렇게 여긴다는 것이 중한 것이겠지.
집에 돌아오는 길에 버스 정류장을 잘못 내려서 한참 걸어서 집에 도착했다. 홍제천에 풀들이 정말 많이 자라있었다. 이미 풍경은 여름에 가까워졌다. 그 우거진 물가가 나는 참 마음에 든다. 집에 돌아와선 어제 나래 언니가 사준 도넛을 먹고 이내 곧 나왔다.
정말 오랜만에 준혁이를 만났다. 어제 갑작스럽게 잡은 약속이다. 오늘 둘 다 별다른 스케쥴이 없어서 준혁이가 우리 동네로 오기로 했다. 나에게 물어보고 싶은 것도 있다고 하면서. 보자마자 준혁이는 나를 놀리고 나는 혼내고 그대로였다. 준혁이는 요즘 생각하고 있는 작업 주제에 대해서 이야기해주었다. 개인 작업을 하고 싶은데 무엇을 어떻게 하면 좋을지 고민이 많았나 보다. 같이 하나씩 고민하고 조금씩 풀어나갔다. 준혁이는 무언가를 말로 표현하는 것에 대해서 어려움을 느끼고 있었는데, 준혁이에게도 일기 쓰기가 필요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준혁이에게 일기를 써보라고 권했다. 내가 요즘 매일 밤 일기를 쓰고 있는데, 내 하루를 반추하며, 감사할 것들이 생기기도 하고, 무언가를 더욱 세심하게 기억할 수 있어 좋다고. 준혁이는 자신에게 지금 꼭 필요한 것 같다며 해보겠다고 했다. 준혁이도 요즘 약간 의욕이 많이 떨어져 있던 것 같은데, 오늘 이야기를 하면서 해야 할 것들을 함께 정리한 것 같았다. 자주 와서 같이 작업도 하기로 했다. 준혁이가 오늘 일기를 썼을까? 궁금하다.
우리가 한참 이야기하고 있으니까 그쳤던 비가 다시 억세게 오기 시작했다. 준혁이는 갔고, 나는 집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비는 종일 왔다. 집에 돌아와선 오지와 영화를 보고 싶었는데, 조금 누워있다 보니 배가 많이 고파서 짜장라면을 끓여 먹었다. 그러고 나서 해야 할 일들을 좀 해보려고 책상에 앉았는데, 우연히 유튜브에서 본 클립으로 인해 우리는 정호근 아저씨가 나오는 영상들을 계속 보게 되었다. 그의 생애 이야기, 무당이 된 사연을 보니 너무나 신기하고, 모든 것이 이해가 갔다. 할머니는 만신이었고, 누나들도 모두 신을 받았다고 한다. 그가 신내림을 받지 않아서 생겼던 가슴 아픈 일들. 가장 사랑하는 것을 잃어야 하는 아픔. 참 신의 섭리는, 인간이 보기에는 이해하기 힘들 때가 많다. 그런데 정호근 아저씨는 이제 그것들을 다 진심으로 이해하고 받아들인 영혼처럼 보였다. 사실 그가 무당이 되었다고 했을 때에, 놀라우면서도 믿어지지 않았는데 오늘 그가 무당으로서 신의 메시지를 사람들에게 전하는 모습을 보니 신기하고 감동적이었다. 오지와 나는 저녁 내내 그 영상들을 보면서 시간을 보냈다. 나를 보면 정호근 아저씨가 무어라고 할까 너무 궁금해졌다. 나의 주변에도 나를 지켜주는 누군가가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기도를 많이 해야겠다.
그러고나니 밤이 되었고, 씻으니 자야 할 시간이 되어버렸다. 벌써. 오지는 갑자기 작업하는 방에 있던 가구 하나를 자는 방으로 옮겼다. 우리의 방들은 계속해서 조금씩 바뀌고, 물건들은 계속 이동한다. 조만간에 집에 있는 쓰지 않는 물건들과 옷들을 한바탕 정리해야 한다. 모두 정리하고 가벼워지고 싶다. 비움이라는 것에 대해서 사실 깊이 생각한 적이 없다. 항상 쌓으면서 의미를 찾는 편이었기에. 나는 꽉 찬 책상, 꽉 찬 방, 꽉 찬 사진첩 속에서 더 안심할 수 있었던 것 같다. 오지와 나는 스스로를 맥시멀리스트라고 불렀다. 그런데 올해 사마리아가 처녀자리 운세에 대해서 말해 준 것은 모든 것들을 다 정리하고, 아주 가볍게 언제든지 떠날 수 있는 준비를 해야한다고 거듭 강조했던게 계속 떠오른다. 나도 비우는 것을 알아가는 시간이 된 걸까. 채우고 비우고. 일기를 쓰는 것도 어찌보면 비우는 일이 아닐까. 속에 쌓여있는 말들을 비우는 것. 데이터는 쌓이지만 말이다. 오늘처럼 선생님을 만난 날도. 그러고보니 참 재미있는 작업이구나 모두.
이상하게 뱃속도 하루종일 비어진 느낌이다. 배가 계속 고프네. 이것은 생의 의지겠지. 생의 의지는 말로 뱉어질 때에 배가 되고, 마음 속에서는 자주 수그러든다. 쭈글쭈글한 나의 생의 의지. 쭈글쭈글한 모두의 생. 재미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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