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요일, 5월 05, 2021

영원과 하루

꿈에서부터 이미 시작되는 하루.

불교 의식을 했다. 나는 유황에 나뭇가지 끝부분을 몇 초간 담갔다가 꺼내어 내 주변을 감싸듯이 빙빙 돌렸다. 그 연기가 나를 감쌌다. 아주 빠르게 탔다. 내 옆에는 친구들이 있었다. 모두가 각자의 자리에서 기도를 드리고 있었다. 빠르게 타들어 가는 그 향이 마지막에는 거의 불꽃으로 변했다. 그때 주변에 있던 휴대용 가스레인지에 불꽃이 튀겨 부풀어 올랐고, 폭발할까 봐 모두가 고개를 숙이고 숨었다. 다행히 폭발은 일어나지 않았다. 기도하던 중에, 잠깐 나는 아주 인간적인 마음으로 무언가를 소망했는데, 그 때문에 갑자기 그 불꽃이 튀어 위험해진 것 같아서 아주 뜨끔했다. 다시 집으로 돌아가 정돈을 하고 기도하기로 마음먹었다.

robert gigs

잠결에 꿈을 메모해두었다. 로버트 긱스라는 이름의 유명 작가가 나왔다. 검색해보니 그런 작가는 없는 것 같다. 저 이름은 어디에서 나온 것일까.

일찍 일어나 누워 있었고, 오지도 이내 곧 일어나 꿈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꿈에서 나온 노래를 알고 싶다고 했다. 오지가 허밍으로 부르는 멜로디를 나는 전혀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갈피를 잡을 수도 없어서 수많은 곡을 재생하며 꿈속의 노래를 찾고 있었다. 그렇게 오전을 다 보내고, 갑자기 약간은 허무하게 노래를 찾아냈다. 내가 너무나도 잘 알고, 너무나도 좋아하는 프로콜 하럼의 a white shade of pale이었다.

그리곤 급히 옷 수선을 떨다가 이안이네 집으로 향했다. 우리는 지난번에 가려고 했다가 실패한 승가사를 가보기로 했다. 차로 갈 수 있다는 이야기를 어딘가에서 들었던 터라, 우리도 이안이 차를 타고 갈 수 있겠지 하는 생각에 자신 있게 길을 찾아 나섰다.

산을 오르는 입구에 도착하자 차를 끌고 갈 수 있는 길은 사라졌다. 우리는 우왕좌왕하다가 지나가던 등산객 아저씨께 여쭤봤다. 알려주신 곳으로 가니 오늘은 승가사로 올라가는 셔틀이 운행하지 않는다고. 일반 승용차는 올라갈 수가 없다고 했다. 우리가 그럼 걸어가겠다고 하자 포기하라고 말씀하시는 주차관리인 아저씨. 너무 웃겼다. 포기하라니. 하지만 우리는 우리 멋대로 길을 찾아 나섰다. 전에 갔던 혜림정사 옆에 승가사를 향하는 길이 있었기 때문에 다시 혜림정사를 찾았다. 승가사라고 쓰인 표지판이 있는 길로 들어섰다. 그 길은 울퉁불퉁하긴 하지만 차가 올라갈 수 있는 길이긴 했다. 하지만 아주 가파른 길이었다. 일반 등산객들은 그 길을 그냥 죽 걸어 올라가면 되는 것이었다. 인터넷에 찾아보니 약 35분 정도 시간이 걸린다고 했다. 정말 조금 걷다가 이건 무리일까 하는 생각이 사실 들긴 했다. 우리에게 포기하라고 했던 아저씨가 맞는 것 같았다. 지나가는 차가 있었으면 좋겠다는 헛된 희망을 가지고 있던 우리들은 정말 짜인 각본처럼 갑자기 뒤에서 차가 오는 소릴 들었다. 파란색 트럭이 오고 있었다. 이안이는 트럭을 세워 승가사에 가는 우리를 태워달라고 부탁했다. 아저씨는 아주 흔쾌히 우리를 태워주셨다. 아마 승가사에서 공사를 하시는 아저씨인 것 같았다. 이안이는 아저씨와 앞에 타고, 나와 오지는 트럭 뒤에 탔다. 일하는데 쓰시는 트럭이라 그런지 트럭에는 흙이 아주 많았다. 우리 옷은 흙으로 뒤덮였다. 길이 정말 울퉁불퉁하고 가파르기 때문에 우리는 계속 들썩들썩 각자 옆에 있는 밧줄과 공구를 손잡이 삼아 잡고 몸을 가누었다. 오지와 나는 계속 웃었다. 서로의 우스꽝스러운 모습을 보면서, 이 모든 상황을 보면서. 아주 가끔씩 지나가는 사람들이 우리를 신기하게 쳐다보았고, 가는 길 도중엔 포크레인을 마주쳐서 잠시 정차해야 하는 상황도 일어났다. 이윽고 산 중턱에 멋지게 자리하고 있는 승가사에 도착했다. 드디어.. 항상 이상하고 재미있는 일들이 우리에게 다가오는 것 같았다.

승가사 구층석탑 앞에 도착한 우리들. 뒤에는 죽 펼쳐진 푸른 산의 풍경이 그리고 멀리 도시의 풍경이 펼쳐져 있었다. 계속 우리는 감탄만 했다. 승가사에 도착했던 때는 이미 오후 5시쯤이었던 터라 사람이 하나도 없었다. 비구니 스님들 두 분만 마주쳤다. 승가사를 살펴보려면 계속 오르막길 혹은 계단을 이용해야 한다. 아주 높은 절이다. 그리고 우리 앞에 108계단이 나타났다. 108계단 끝에는 커다란 절벽 바위에 마애석가여래좌상이 새겨져 있었다. 나는 기도하는 마음으로 108계단을 올랐다. 오늘 꿈을 생각했다. 내가 꿈에서 너무나 인간적인 기도를 해서 벌을 받는 것 같다고 느꼈던 것이 생각났다. 나는 아주 간단하게 기도를 하며 올라갔다. 호오포노포노명상을 하는 것처럼. 계단을 모두 올라가자 우리는 정말 제일 높은 곳에 있는 것 같았다. 너무 멋진 풍경이 한눈에 들어왔다. 서울에 이렇게 커다란 산이, 그리고 커다란 산에 있는 사찰이 있다는 것이 새삼 놀라웠다. 이렇게도 아름답고 멋진 사찰이 있다니. 우리는 아주 평안했다. 마애여래좌상 앞에서 우리는 손을 모아 기도했다.

저녁이 금방 다가오고 있었기 때문에 우리는 서둘러 내려가야 했다. 도중에 승가사 곳곳을 더 들르긴 했지만 말이다. 우리는 트럭을 타고 올라왔던 그 길을 걸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우리는 내려가는 내내 노래를 불러댔다. 새소리를 내고 싶었다. 해는 많이 내려왔고 거의 우리와 멀지 않은 것 같은 높이에 있었다. 옆에 보이는 봉우리에 해가 가까웠다. 가까운 그 해가 비추는 세상은 정말이지 축복을 받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우리는 내려가는 길에 몇 번이나 멈추어 햇살이 주는 축복을 받고, 감사해했다. 햇살을 투명하게 받아들이는 초록색 잎들과 우리의 말간 얼굴들. 너무 오랜만에 느껴보는 축복이었다. 그렇게 천천히 가파른 길을 내려왔다.

지친 우리들은 다시 도시로 내려와 칼국수를 먹었다. 식사를 마친 뒤엔 이안이네 집에 가서 오늘 있었던 일들을 돌이키며 한참을 웃고, 서로의 사진과 영상을 공유했다. 정말 정말 많이 웃었다 우리는. 이안이 집에 편히 앉아 티비도 보고, 디저트도 먹고, 떠들다가 늦은 밤이 되어 집에 돌아왔다. 아이들은 오늘 무얼 했나. 그러고 보니 우리 아이들에게는 어린이날을 축하해주지 않았네. 도리어 우리가 어린이가 되어 하루종일 놀았구나. 우리보다 고양이들이 더 어른스러운 것 같다. 미셸은 오늘 내 냄새를 많이 맡았다. 내가 가만히 바닥에 엎드려 있었거든.



꿈으로 시작하여 꿈으로 끝나는 하루. 승가사에서 보았던 그림. 집에서 다시 이 그림을 보니, 이건 오늘 내 꿈의 장면이다. 향을 들고 있는 나. 내 옆에서 기도하고 있는 친구. 이미 보았던 하루. 이미 살았던 하루. 연등에 붙어있는 극락왕생이라는 말이 계속 생각났다. 계속 다시 살아나는 우리들. 우리는 수천 번을 죽고 다시 살아난다. 그리고 햇살이 얼굴에 드리울 때마다 극락을 경험한다. 오늘은 영원과 하루.




댓글 없음: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