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요일, 10월 04, 2018
수요일, 9월 05, 2018
안경을 새로 맞췄다. 내가 보던 세상과는 너무 달라서 사실 하루종일 짜증이 났다. 사람들도 다 짜부된 것 같고 땅이 너무 가까운 것만 같고 나는 너무 못나고 얼굴을 쳐다보기가 싫었다. 원래 그렇게 생겼던 것두 모르고. 그렇담 나는 늘 그렇게 왜곡된 화면을 보고 지냈던 것일까? 다들 피부가 부드럽고 길쭉하고 예쁘고 반짝이는 세상. 무엇이 좋은 것인가 한참 생각을 했다.
안경을 뺐다가 꼈다가 생활을 하다보면, 내 뇌에서는 어느 것이 진짜 시력인지 헷갈려한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 말이 자꾸만 생각이 났다. 그런데 정말이지 이 너무나도 선명하게 보이는 이 눈은 참 너무 잔인했다. 그치만 좋은 것을 찾아보자면, 오늘 밤 나는 맨눈으로는 안보이는 별을 보았다. 안경을 내렸다가 올렸다가 하면서 사라졌다가 나타나는 별을 구경했다. 우리집 언덕길을 오르며 마주치는 버스정류장에 써있는 정류장 이름도 조금 멀리서도 보였다. 그 정류장을 지나면서 고개를 들고 그 또렷하게 보이는 글자들을 계속 쳐다보았다.
또 하나, 검안을 하고, 그 이야기를 들은 후부터는 며칠간 이런 생각에 빠져있었다. 내 뇌에서 안경을 쓴 눈의 시력과 안경을 쓰지 않은 눈의 시력 중에 무엇이 진짜인지 가짜인지 헷갈려하는 동안에, 조금은 기분이 나아진 나의 모습을 보며. 예전의 나와 지금의 나, 어느 것이 진짜 나의 모습인지도 헷갈려하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 엉망진창이지만 생의 의지가 가득하던 때의 나와, 조금은 안정적이지만 생의 의지가 없는 나. 무엇이 원래의 나일까. 무엇이 더 건강한 나의 모습일까 하는 생각.
오전부터 낮까지는 기분이 참 안좋았다. (내 짜증과 화를 받아준 내 소중한 사람에게 심심한 사과를 건넨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서일까, 안경을 벗어서일까, 안경을 벗은 이후로는 기분이 좀 나아진 것 같다. 아무튼 친구랑 이야기를 나누다가 친구덕에 나도 조금은 좋은 생각을 할 수 있게 되었다. 그 전에는 무엇과도 눈을 마주치고 싶지가 않은 기분이었다. 우리는 현존하는 삶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 나는 바로 거기서 내 괴로움의 원인을 찾았다. 내가 현존하지 않음으로 겪는 괴로움. 아직 일어나지 않은, 혹은 결코 일어나지 않을 것들에 대해 괴로워하고 있었는데, 어찌나 눈이 멀었던지 내가 그러고 있는줄도 몰랐다. 그 바보짓을 하느라 현재의 것을 보지도, 현재의 사람들과 이야기하지도 않고 있었다. 그러고보니 안경을 벗어서 기분이 좋아진 것이 아니었다. 지금은 안경을 다시 썼고, 이제는 시원하다.
그래서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갈비뼈를 부풀렸다가 쪼그라트렸다가를 반복하면서 숨을 쉬었다. 눈을 감고 현존하는 나의 중심으로 돌아오려고 시도해보았다. 그러고보니, 요즘 나는 이 호흡에 아주 집중하고 있었는데, 비록 처음엔 그것이 현존하는 나의 중심으로 돌아오려는 시도는 아니었지만, 그 숨이 바로 오늘 내 현존에 대한 문제와 조우한 것이다. 사실은 내가 어느 순간에 숨을 멈추거나 숨을 아주 얕게 쉬고 있을 때가 많다는 것을 알고는 이 숨쉬기 연습을 시작한 것이었다. 오늘 있던 대화들과 내 숨들을 돌이켜보니, 이런 생각이 든다. 내가 숨을 제대로 쉬기 위해 시작한 이 연습은, 어쩌면 내가 오늘 다시 깨달은 것, 현존하는 삶을 살 수 있도록 할 어떤 새로운 시작점이었던 것이다. 제대로 호흡을 한다는 것 자체가 어쩌면 현존하다라는 말과 같은 의미일지도 모르겠다.
어제 오랜만에 비닐봉지가 춤을 추는 것도 두번이나 보았다. 늘 보이던 그것이 요즘엔 한번도 보이지가 않았는데, 갑자기 어제 내 앞에 나타났다. 그것을 보며, 나에게 어떤 변화가 일어나려는 것일까 짐작은 했는데, 그것이 오늘인 것 같다. 안경을 새로 쓰고, 새로이 숨을 쉬는 것.
토요일, 8월 18, 2018
월요일, 8월 13, 2018
옥상에 올라가 파이프를 피우는데 저 앞에 하늘에 직선의 빛줄기 몇개가 왔다갔다 하는 것을 보았다. 내 눈이 잘못됐나하고 똑똑히 보려고 했는데 정말로 그 빛줄기들은 사라졌다가 나타났다가를 반복했다. 저 동네는 뭐 반짝반짝 재미난 일이 일어날 곳이 아닌데 하면서 혹시 드디어 나에게 이제 새로운 것을 보는 능력이 생긴 걸까하는 생각으로까지 이어졌다. 개나 고양이처럼 자기장을 본다던가 다른 차원의 어떤 물질을 볼 수 있게 되는 것 말이다. 하늘에 피어나는 아지랑이들과 빛줄기들을 뚫어져라 쳐다보다가는 그런 생각도 이내 그만두었다. 사실 그건 분명히 다른 사람들의 눈에도 보일 만한 빛줄기였다. 아무 것도 아닌 것을 가지고 한번 거창한 생각을 해보았다.
스물에는 넘치는 행복을 내 몸으로 다 담을 수가 없어 어쩔 줄을 몰랐는데, 스물 다섯 쯤이 되었을 때에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을 정도의 불안을 느꼈다. 왜 나에겐 늘 중간이 없는 것일까, 좀 편안해질 수는 없을까하는 둥의 생각을 매일 했던 것 같다. 이제는 그 모든 에너지의 흐름들이 축. 하고 가라앉아서는 올라설 기미를 보이질 않는다. 그래서 혹시 이게 내가 어떤 새로운 단계에 접어들었다는 표시는 아니었을까하고는 그런 허무맹랑한 생각을 해본 것이었다. 그 허연 빛줄기들. 그냥 모두가 이런 나이들과 이런 감정을 거쳐서 서른이 되고, 마흔이 되고, 쉰이 되고.. 그렇게 살아가는 것일까 ? 삶이란 것은 어딘가로 향하는 과정이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요즘은 어쩌면 삶이란게 정말 순차적으로 어떤 단계를 밟고 밟아 죽음으로, 그저 늙은 상태로 나아가는 과정이면 어쩌지하는 생각이 들어 두려워졌다. 아무 것에도 크게 감동하거나, 기뻐하거나, 슬퍼하지 않는 상태가 되는 것은 정말 끔찍한 일일 것 같다.
그러다가 갑자기 제임스 블레이크 노래가 나왔다. 얼마전에 현대 대중음악 시장이 제임스 블레이크를 저평가하는 경향이 있다는 글을 보았던게 생각이 났다. 정확히 어떤 글이었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지만 그 부분만 기억이 난다. 그래서 나는 여느 때처럼 다음 곡으로 넘기지 않고 그대로 제임스 블레이크가 입을 떼기를 기다렸다. 심지어 나는 내 플레이리스트에 그의 노래가 아직까지 남아있는지도 몰랐다. 빌헬름 스크림이 나오고 있었고, 그가 드디어 말했다. 아뿔싸. 그것은 지금 내가 마음 속으로 되내고 있는 말이었다. 그는 내 마음을 정확히도 말하고 있었다. 울고 싶었다.
어제, 어제도 목에 울음이 가득차 있었다. 늦잠을 자고 일어나 하루종일 멍한 상태로 일을 하고 하루를 보내다가 겨우 오늘을 맞이했다. 목에 걸린 울음은 사라졌지만 여전히 나는 울고 싶었다. 며칠 전엔 그림을 그려보려 했지만 잘 되질 않았다. 끄적거린 종이들을 그냥 전부 찢어버리고는 고양이만 남겨놓았다. 고양이는 찢어버리기 좀 그러니까.
어제, 어제도 목에 울음이 가득차 있었다. 늦잠을 자고 일어나 하루종일 멍한 상태로 일을 하고 하루를 보내다가 겨우 오늘을 맞이했다. 목에 걸린 울음은 사라졌지만 여전히 나는 울고 싶었다. 며칠 전엔 그림을 그려보려 했지만 잘 되질 않았다. 끄적거린 종이들을 그냥 전부 찢어버리고는 고양이만 남겨놓았다. 고양이는 찢어버리기 좀 그러니까.
나에게 아무 것도 없다는 생각, 하고 싶은 것도 해야할 것도 없다는 생각이 나를 집어삼켜 두려움만이 남아 있었다. 계속 운명이 어쩌니 저쩌니 하는 생각이 머리를 떠나질 않았다. 나에게 운명이란 것이 있다면 그것을 내가 받아들이기 힘들 때에, 그것이 전혀 내가 원한 것이 아닐 때에, 나는 그럼에도 삶을 살아가야 하는가? 두려움이 나를 집어삼켜버렸다. 그치만 으레 내가 해왔듯이 그 와중에 무언가를 발견하는 것이다. 아무 것도 없다는 두려움을 느낄 때에, 나에게 두려움이란 것이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 사실 아무 것도 없는 것이 아니라, 진정으로 나는 두려움이란 것을 갖게 된 것이다. 이것으로 무엇을 할까 생각했다. 그래서 일단 글을 먼저 썼다. 파이프를 다 피우고 들어간 후에는 다 연기처럼 사라질까봐 핸드폰을 열어 메모에 일단 빛줄기의 이야기며, 제임스 블레이크의 노래며 다 적었다. 그리고 다시 그것을 여기에 옮겨적고 있다. 아무 것도 하지 않을 때에, 나에겐 아무 것도 없는 것이다. 아무 것도 없을 때에도 나는 무언가를 할 수 있을 것이다. 게다가 이 두려움은 어떤 형식으로라도 세상에 제 모습을 남기려고 애를 쓸 것이다. 괴상한 붓질이라던가, 작은 메모라던가, 작은 비디오라던가, 사진이라던가.
화요일, 7월 10, 2018
비가(悲歌)
지나가는 누구라도 붙잡고 묻고 싶었나보다. 나는 너무 슬펐다. 카페에 들렀고, 책방에도 들러보았다. 오래간만에 간 카페 사장님은 날 전혀 기억하지 못했다. 그래서 나는 그 카페를 처음 방문한 손님이 되어야만 했다. 사장님은 내가 고른 커피에 대해서 친절히 설명해주셨고, 나는 그저 작게 웃으며 그의 설명에 따라 커피를 홀짝 마실 뿐이었다. 파이프를 피우는 것도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 비를 조금 맞으며 파이프를 피웠다. 엄마에게 전화가 왔고, 엄마는 토끼가 우리에서 빠져나와 여기저기를 뛰놀며 자기가 좋아하는 풀들을 뜯어먹는다는 이야기를 해주었다. 엄마의 이야기는 언제나 나의 삶에 작은 즐거움과 작은 짜증을 준다.
그리고 금방 나는 그 자리를 떴다.
나는 어딘가에 머물러, 그 곳의 누군가와 어떤 재미난 대화를 나눌 수 있지 않을까, 오가는 그 대화 속에서 어쩌면 무언가를 찾을 수 있지 않을까 희망해보았다. 그치만 그건 아주 웃긴 희망이었다. 그런 것은 바라면 안되는 것이다. 누구도, 무엇도 비난할 마음은 없지만 그런 것은 원래 희망한다고 해서 일어나는 것이 아니다. 그저 어쩌다가 우연히 주어지는 선물같은 것이고, 그것을 찾으러 갔을 때에는 없는 그런 것이다.
어제밤에 다시 내가 좋아하는 시가 생각이 나서 읽어보았다. 몇번을 소리내어 읽었다. 돌아가신 아버지의 커다란 코트로 나와 내 아우의 작은 코트 두개를 만들어 입는 것. 왜 나는 갑자기 그 시를 읽었지. 알았다! 어쩌면 이제는 정말 그저 제 때가 오면 밥을 챙겨먹고, 약을 챙겨먹고, 잠을 자고, 일어나는 일을 해야하는 것이다. 그리고 삶은 계속 되어야만 한다고 말하는 것이다. 정확히 그 이유는 잊었지만 말이다. 아니, 이유는 사라졌다. 이유란 것은 사라졌다가 또 나타났다가 하는 것이다. 그러니 정확히 그 이유는 잊어버리고마는 그런 때가 오더라도 삶은 계속 되어야하는 것이다. 어떤 날에는 이유를 찾을 것이고, 어떤 날에는 이유를 찾을 수가 없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다시 한번 생각해보았다. 나의 우주가 커다랗고 둥근 원을 그린다는 사실(결코 나에게 불안을 주지 않을 것만 같던 법칙)보다 중요한 것은 그저 삶이 계속된다는 것이었다. 삶이 어떻게 이루어져있는지를 아는 것보다는 삶이 어쨌거나 저쨌거나 계속 이어진다는 것. 조금 전에 아주 발작적인, 그러나 그렇게 크지는 않은 행복을 느꼈는데, 그 순간에 나는 속으로 너에게 말해보았다. 지금 나의 목을 졸라달라고. 그런 때에 삶이 정지될 수 있다면, 그것은 좋은 죽음일 것이라는 생각. 그렇지만 너는 그렇게 하지 않을 것이므로 나의 삶은 계속된다는 생각. 그런 생각들이 이어졌다. 그렇게 그런 식으로 삶은 계속되는 것이었다.
수요일, 7월 04, 2018
marseille
뚤롱이 아니라 마르세유로 가기로 결정이 되었다.
파리에서 마르세유 타로를 샀다. 타로점을 보고 마르세유를 가기로 결정했다. 두번이나 그랬다. 나에게 어떤 인연이 있는 것이겠지하고 믿는 수밖에 없다. 지금은 나에게 아무 것도 없지만 그 때에는 있어야만 한다. 그래야만 한다는 것은 없지만, 어쩌면 다시 나는 그래야만 한다고 외쳐야할 지도 모르겠다. 진정으로 그래야만 한다는 것이 없어졌을 때, 죽어야만 한다는 것도 없지만, 살아야만 한다는 것도 없어진 것이다. 그러니 무언가는 그래야만 한다. 그래야만 한다. 그래야만 내가 생을 이어갈 수 있을 것이다.
파리에서 마르세유 타로를 샀다. 타로점을 보고 마르세유를 가기로 결정했다. 두번이나 그랬다. 나에게 어떤 인연이 있는 것이겠지하고 믿는 수밖에 없다. 지금은 나에게 아무 것도 없지만 그 때에는 있어야만 한다. 그래야만 한다는 것은 없지만, 어쩌면 다시 나는 그래야만 한다고 외쳐야할 지도 모르겠다. 진정으로 그래야만 한다는 것이 없어졌을 때, 죽어야만 한다는 것도 없지만, 살아야만 한다는 것도 없어진 것이다. 그러니 무언가는 그래야만 한다. 그래야만 한다. 그래야만 내가 생을 이어갈 수 있을 것이다.
화요일, 6월 19, 2018
킥보드
킥보드가 있길래 타고 놀아봤다. 내가 초등학교 때 아빠가 사준 건데 아직도 있다. 엄청 오래됐지. 안버리고 있는 것도 참 신기했다. 아무도 안탔을텐데. 근데 생각보다 이 킥보드는 참 튼튼해서 오늘 내가 비록 몇년만에 탄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몇바퀴를 돌고 돌아도 아주 멀쩡히 잘 굴러갔고 꽤 재밌기까지 했다. 트럭이 자꾸 왔다갔다 하길래 그냥 아빠가 포장해버린 마당에서 둥그랗고 크게 빙빙 돌아보았다. 짧은 지름의 원이라 마당 앞의 풍경들이랑은 빨리 만나지고 헤어지고 그랬다. 아빠가 집 앞에 쌓아둔 잡동사니들이 보였다. 어디서 나온 것들인지 어떻게 만들어낸 것들인지 그게 냉장고가 됐든 식탁이 됐든 고양이가 됐든 병아리가 됐든 아빠는 한번도 말한 적이 없었지만 모두 이 곳에선 아빠의 생태계 속에 살아가고 있었다. 녹이 슬어있거나 거미줄이 쳐져있거나 하지만 자세히 보면 잘 정리가 되어있기도 하다. 토끼에게 사람이 먹는 밥을 주기도 하고 고양이랑 토끼를 한 우리에 넣어 기르고 개들은 아주 얕은 산 속에서 지낸다. 오지랑 나는 늘 질겁을 하곤 한다. 모두가 참 이상하게 불쌍하고 안쓰럽고. 아빠가 또 뭔가를 데려왔다는 소식을 들으면 우리는 불쌍하다는 생각이 먼저 든다 (아빠가). 사실 그 동안에 수없이 아이들이 지나가기도 했다. 이렇게도 허접한 보살핌에, 살림에. 그래도 아빠는 꿋꿋이 아빠의 방식대로 밀고 나간다. 집도 아빠 방식대로 만들어주고 밥도 아빠 방식대로 주고. 그런데도 이 토끼들이 포동포동하게 잘 크는 것이 새끼고양이들이 토끼 등에 기대어 잘도 잠드는 것이 개들도 나름 잘 지내는 것이 신기하기도 하다며 어쩌면 아빠가 하는게 맞는 부분도 있을거라며 엄마는 가만히 내버려두라고 했다. 이 공간을 가득 가득 채우고 있는 아빠의 숨이랑 질서에 나는 이제 들어와 어우러질 수 없다는 것을 알지만 어쩌면 그를 이렇게 방문할 수는 있을 것이다. 오늘은 나 혼자 토끼에게 민들레를 꺾어다주고 고양이에게 물을 떠다주었다. 아무도 없는 마당을 빙글빙글 돌면서는 모든 것이 다 괜찮았다.
화요일, 5월 15, 2018
거울
돌을 가지고 있는 누군가
그 때에 이상한 노래소리가 들리곤 했다. 공사장 인부의 노래소리
그곳은 황량한 사막이었다.
나는 때가 되면 거울을 하늘에 비추고 그 돌. 펜듈럼을 갖고 있는 자의 것이 거울 속으로 빨려들어갈 수 있도록 해야했다.
해가 낮아졌고 내가 거울을 들고 그리고 나마지 돌멩이 하나를 손에 쥐고 갔을 때. 이상하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느낌으로 알 수 있었다. 그것을 가진 이거 그 펜듈럼에 자신의 영혼을 넣어버린 것이다. 찾을 수가 없게되었고 그것은 어쩌면 예상된 일이었다. 옆에 있던 부부. 여자는 분홍색 천 얼굴만 가려지는 크기의 천이 시야를 모두 가리고 있는 형태로 하고 있었다. 머리와 나머지 몸은 검은색 차드로 가려져있었고 옆에 남자는 여전히 콧노래였다. 여자는 슬퍼하고 있었다. 이런 일이 벌어진 것에 대해 아주 슬퍼하고 있었다.
그 때에 이상한 노래소리가 들리곤 했다. 공사장 인부의 노래소리
그곳은 황량한 사막이었다.
나는 때가 되면 거울을 하늘에 비추고 그 돌. 펜듈럼을 갖고 있는 자의 것이 거울 속으로 빨려들어갈 수 있도록 해야했다.
해가 낮아졌고 내가 거울을 들고 그리고 나마지 돌멩이 하나를 손에 쥐고 갔을 때. 이상하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느낌으로 알 수 있었다. 그것을 가진 이거 그 펜듈럼에 자신의 영혼을 넣어버린 것이다. 찾을 수가 없게되었고 그것은 어쩌면 예상된 일이었다. 옆에 있던 부부. 여자는 분홍색 천 얼굴만 가려지는 크기의 천이 시야를 모두 가리고 있는 형태로 하고 있었다. 머리와 나머지 몸은 검은색 차드로 가려져있었고 옆에 남자는 여전히 콧노래였다. 여자는 슬퍼하고 있었다. 이런 일이 벌어진 것에 대해 아주 슬퍼하고 있었다.
월요일, 5월 07, 2018
짜증박사
우리 엄마가 자주 쓰는 말이다. 웃겨죽겠다. 오지와 우리 가족내력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중이었다. 우리 가족은 내구성이 떨어진다. 관절 안좋고, 장기 안좋고, 신경예민, 짜증대박. 좋은게 하나도 없다. 오지은이 기능은 좋다고 했다. 다들 일은 잘하고, 똑똑하다. 것 말고는 여기저기 아프고 쑤시고, 예민하고, 짜증 잘 내고 웃겨죽겠다.
아까는 이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 누구라도 행복하고 평온하고 안정적인 사람을 만나고 싶을 것이다. 그런 마음이 드는게 당연하다. 행복하게 살아온 사람은 행복하게 살아온 사람이랑 잘 어울릴 것이고, 조금 행복하지 못하게 살아온 사람도 당연히 행복한 사람이랑 만나고 싶을 것이다. 아무도 불안정하고 슬픈 사람을 만나고 싶은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슬픈 사람은 도대체 누구와 사랑을 할 수 있는 것일까? 슬픈 사람은 누굴 만날 수 있을까?
난 너무 슬퍼졌다.
그렇지만 그건 아주 쓸데없는 생각이었다.
나에게는 사랑하는 이가 있다.
금요일, 5월 04, 2018
프랑스에 있는 나
내 동생이 nihil이라는 제목의 글을 남겼다. 내 동생의 허무 혹은.. 허무의 반대말을 쓰려고 하다가 생각이 나질 않아 멈추었다. 그래. 그것은 실존이었다. 다시, 그것은 내 동생의 허무 혹은 실존에 관한 이야기였다. 나는 동생에게 먼저 이야기를 들었을 때처럼, 동생이 아빠와 싸우다가 '아빠 다리'를 한 채 아빠에게 사과를 했다는 대목에서 또 웃음이 터지고 말았다. 참 웃기다. 그 앉은 모양새의 이름은 왜 아빠 다리일까. 이따금씩 별 의미없이 쓰던 말들이 이상하게 느껴지는 때가 있다. 아빠 다리를 한 채, 아빠에게 사과를 했고, 아빠는 그것이 사과하는 사람의 태도냐고 물었다고 했다. 정말 누구라도 웃지 않을 수 없는 대목일 것이다. 그렇지만 그 글의 말미에 가서는 눈물이 나고 말았다.
엄마는 숨소리도 들리지 않게 조용했는데, 코끝이 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이걸 쓰면서 또 눈물이 난다. 엄마의 생일을 하루 앞두고 내 동생이 겪은 아빠와의 다툼, 그리고 그 전에는 서울에 우박이 쏟아졌다는 이야기. 그것들은 다 무슨 조화일까. 우리의 실존이 실재하는 한 허무라는 것은 있을 수 없을지도 모른다. 오지은은 한번도 허무한 적이 없으며, 실존하지 않은 적이 없다. 자신이 허무하다고 느낄 때에도, 그를 아는 누군가가 한명이라도 있을 때에, 혹은 그가 남긴 글이 하나라도 있을 적에는, 그는 허무가 아니다. 우리가 어떠한 가정을 하더라도, 설사 이 세상이 아무 것도 아니라는 가정, 모든 것은 결국 무, 아무 것도 없는 것이라는 가정을 해보더라도, 그 모든 상황들은 우리가 가정한 실존의 상태이다. 결국 우리가 생각해낸 모든 것들이 진정으로 이 모든 세상에서 다 사라지고 났을 때에 허무란 것이 가능할 것이다. 허무가 가능하다. 이 말도 웃기다. 다시, 그렇기에 또 모든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말할 수 있다. 아무런 의미가 없다. 아무런 의미가 없다.
아무런 의미가 없다. 생각해보니 어젯밤 나도 계속해서 이 말을 되내었는데. 살아갈 의지가 없을 떄는 생의 의미를 찾게 되고, 진정으로 살아있을 때에는 생의 의미라는 것이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식의 생각이었다. 요즘 내가 생의 의미를 찾고 있지 않다는 것을 깨닫고는 일게된 사실이다. 어젯밤에는 오늘 내가 또 생의 의미를 찾게 되진 않을까 약간 두려웠지만, 다행히 오늘도 나는 생의 의미를 찾지 않고 하루를 보내고 있다.
나는 프랑스에서 지내고 있다. 프랑스에서 지내며 글을 쓰고 있는 내 모습이라니, 이것은 내가 이전에 무척이나 바래왔던 모습이다. 이 곳에서 나는 매일 사진을 찍고, 산책을 하고, 밥을 먹는다. 내가 바래왔던 모습이었지만, 막상 그 모습을 하고 있는 나는, 내가 그런 모습을 바랐다는 것 조차 잊고 있었다. 내 동생이 글의 첫 머리 즈음에서 언니는 프랑스에 가 있다고 언급한 덕에 내가 정말 프랑스에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프랑스에 가 있는 언니라니. 마치 어떤 소설의 주인공의 언니가 된 것 같았다. 내가 소설의 주인공은 아닌 것 같았다. 그래서 나도 갑자기 글을 써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요즘엔 동길이에게 쓰는 메일 말고는 글을 그렇게 많이 쓰는 것 같지가 않다. 꼭 글을 쓰는 법을 잊어버리고 말 것만 같은 두려움이 가끔씩 찾아온다. 그것은 내 실존에 대한 위협일 것이다. 어쩌면 글을 남기는 것이, 사진을 찍는 것이 나의 실존을 확인하는 일일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그토록 나는 기록하는 것에 집착에 가까운 열정을 가지고 있는 것일까. 그것은 내 실존에 대한 집착이자 열정인 것일까. 오늘은 무엇도 깨우치지 않는 글을 쓰려고 했지만 나는 또 다시 이런 짓을 하고있다.
나는, 단지, 어디론가 향하는, 무엇인가를 해나가는 이야기를 쓰고 싶었다. 나는 오늘 무엇을 했지. 오늘은 일어나 밥을 먹고, 담배를 피우다가 카페에 갔다. 오랜만에 라떼 한잔을 먹었고, 바나나 브레드도 한조각 먹었다. 꼭 상상했던 맛이어서 기분이 좋았다. 그리고 친구와 타로카드를 몇번 뽑아보고는 버지니아 울프의 '자기만의 방'을 몇 페이지 읽었다. 옆 테이블에 앉은 사람들의 목소리가 너무 커서 글자가 눈에 잘 들어오지 않았다. 그래. 어쩌면 오늘은 참으로 자기만의 방이 필요한 날이었다. 책을 읽어내려가는 동안에도 나는 몇번이나 커다란 목소리들에 방해를 받았고, 이 글을 써내려가는 데에도 작은 방해물이 일어나고 있다. 이를테면, 오랜만에 커피를 마신 탓에 자주 오줌이 마려워지는 것이라든지, 개똥벌레라든지, 술에 취한 동길이의 전화라든지. 그러나 그들을 미워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우리는 모두 한 방에 있었고, 그곳에도 이곳에도 나만의 방은 없었기 때문이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곤, 막스 리히터의 음악을 틀어놓고, 이 하얀 배경 위에, 검은 글씨들이 생겨나는 페이지에 온전히 집중하는 일이다. 오늘은 밖에 나가서 놀려고 했던 계획도 포기했다. 저녁이 다가올 무렵에 집 근처 골목에서 파이프를 피우고, 노래를 들으며 몸을 움직여 보았다. 그러고 집에 돌아오니, 아, 그 때였다. 내가 대문을 여는 순간에 내 동생이 보내준 글을 읽기 시작했다. 그 글을 읽으면서 나는 '아빠 다리'에서 웃음을 터뜨렸고, 엄마의 미간 주름, 엄마의 빨갛게 달아오른 코를 읽으며 눈물을 흘렸던 것이다. 그렇게 다시 이 방으로 돌아온다.
나는 아주 차분해졌고, 조용해졌다. 그러나 다시 나는 자기만의 방의 필요성을 절실히 느낀다. 써내려갔던 몇 줄의 이야기들을 결국엔 모두 지워버렸고 잠에 들기 전에 이 글을 고친다. 모든 것이 흐트러져버렸고 배가 고프고 잠이 오질 않는다.
토요일, 4월 28, 2018
5시부터 7시까지의 클레오
5시부터 7시까지의 클레오를 보았다. 클레오. 플로랑스. 파리에서 보는 아녜스 바르다의 영화는 그 무엇보다 아름답고 서글프고 우스웠다. 나는 매일같이 클레오가 되었다가 플로랑스가 되었다가를 반복하고 클레오와 플로랑스의 불안이 시간을 채운다. 미는 추이고, 추는 미다. 평온과 부유 곁에 불안과 가난이 있다. 하나의 시공간 속에서 이렇게도 대립되는 영상들을 발견할 수 있는 곳이 파리말고 또 있을까하는 생각을 한다. 개구리를 먹는 아저씨와 아름다운 모자가게, 평화롭고 여유로운 정원, 카페에 앉아있는 사람들, 길 위에서 자는 사람들ㅎ 매일 그들을 지난다. 지금의 나는 그 어디에도 안착하지 아니한 채, 그 어느 곳에도 편입되지 않는다. 모두가 자유하지 아니하고, 모두가 배불리 먹을 수도 없고, 모두를 위한 사랑도 없다. 죽음이 두려운 때에는 생의 풍경이 선명하고, 생이 두려울 때에는 죽음의 풍경이 선명하다. 그래. 두려움이란 것은 끝이 없는 것이다. 그러나 어쩌겠는가. 결국에 이것들은 그늘 없는 풍경에서도 아름답고, 빛이 희미한 풍경에서도 아름답다. 어쩌면 이것은 거대한 비극이다. 검은 선글라스는 언제라도 벗어버릴 수 있지만 그것은 언제나 다시 내 가방 속에 있다. 비둘기는 땅에 붙어있는 것들을 쪼아먹는다. 길가 곳곳에 뿌려진 오줌길. 흐르는 물줄기. 어느날엔 물줄기를 따라 물이 시작되는 곳을 찾아가본다. 고양이는 잘 보이지 않는다. 이것이 가장 슬프다. 그러나 지금 갑자기 나는 아주 이상한 안도감을 느낀다. 내가 비극이라 부르는 것 속에서도 기어코 아름다움을 찾아나서다니ㅎ 각자의 비극 각각의 비극은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것인데.. 그치만 내가 그 길에서도 나무가 흔들리는 것을 보고 꽃잎이 흩어져있는 것을 보았단 사실을 떠올리고는 참으로 이상하고 우스운 안도를 하는 것이다.
토요일, 4월 07, 2018
내 친구 석희선의 글을 읽고
나도 평생 이런 사람이다. 나는 언제라도 슬픔을 꺼낼 수 있다. 끊임없이 나의 처량함을 본다.
때로는 다른 이들의 몸을 통해 내 처량함을 본다. 그리고 내가 어쩌면 그들의 몸을 훔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느 때에는 그들의 처량하고 고단한 몸을 발견해내려는듯 이리저리 떠돌아다니며 사진을 찍는 내 자신에 다시 연민을 느낀다. 예전에는 이 일에 고통을 느끼지 않았지만 요즘은 조금 무섭다. 대신에 비둘기라던가 나뭇가지라던가 까마귀는 아무렇지 않게 찍는다. 어제는 죽어있는 비둘기 한마리와 그 비둘기의 주위를 빙빙 돌며 구구거리는 또 다른 비둘기를 보았다. 한참동안 그 모습을 보았다. 비둘기로부터 이어진 생각은 아니었지만 내가 죽는 생각을 했다. 그러나 그 생각은 곧바로 오지은의 눈물로 이어졌다. 그것은 나를 너무나 슬프게 만들었다. 왜 나의 죽음은 다른 이들에게 고통이 되는 것일까. 혹시라도 내가 너보다 먼저 죽는다면 너무 슬퍼하지말라고 말했다. 내가 평안을 찾았다고 생각하라고 말했다.
죽는다는 것과 그저 이별하는 것과는 무슨 차이가 있을까. 어떤 존재가 더이상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은 왜 그렇게 슬픈 일일까. 나는 이렇다. 아마도 평생 이럴 것이다. 모든 것은 아름다운 의미로 가득 찼다가도 아무 것도 아닌 것이 된다. 갑자기 나는 내가 이 땅 위에 서있을 하나의 이유도 찾지 못하기도 한다.
오늘은 심장이 천천히 뛴다. 어쩌면 이것은 단순히 나의 심장의 문제일까. 나의 신경전달물질의 문제일까. 너무 구린 일이다. 나는 내 심장이 일정한 속도를 맞출 수 있도록 애를 쓰고 있다. 토마토랑 가지랑 양파랑 마늘이랑 구워먹고. 나는 어쩌면 이렇게 평생 불안과 허무를 오가며 살 것이다. 물론 그것이 행복한 각성일 때도 심심한 평안일 때도 있겠지만 결국에는 그것과 그것이다. 내가 세상의 모든 일에 의문을 그치는 날이 그것들에서 처량함을 발견하는 일을 그치는 날이 모든 불안과 기쁨이 그치는 날이 나의 죽음일 것이다. 어제는 눈물이 났지만 오늘같이 이렇게도 심심한 평안과 허무에서 그치는 것에 감사함 날도 있다는 것을.
때로는 다른 이들의 몸을 통해 내 처량함을 본다. 그리고 내가 어쩌면 그들의 몸을 훔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느 때에는 그들의 처량하고 고단한 몸을 발견해내려는듯 이리저리 떠돌아다니며 사진을 찍는 내 자신에 다시 연민을 느낀다. 예전에는 이 일에 고통을 느끼지 않았지만 요즘은 조금 무섭다. 대신에 비둘기라던가 나뭇가지라던가 까마귀는 아무렇지 않게 찍는다. 어제는 죽어있는 비둘기 한마리와 그 비둘기의 주위를 빙빙 돌며 구구거리는 또 다른 비둘기를 보았다. 한참동안 그 모습을 보았다. 비둘기로부터 이어진 생각은 아니었지만 내가 죽는 생각을 했다. 그러나 그 생각은 곧바로 오지은의 눈물로 이어졌다. 그것은 나를 너무나 슬프게 만들었다. 왜 나의 죽음은 다른 이들에게 고통이 되는 것일까. 혹시라도 내가 너보다 먼저 죽는다면 너무 슬퍼하지말라고 말했다. 내가 평안을 찾았다고 생각하라고 말했다.
죽는다는 것과 그저 이별하는 것과는 무슨 차이가 있을까. 어떤 존재가 더이상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은 왜 그렇게 슬픈 일일까. 나는 이렇다. 아마도 평생 이럴 것이다. 모든 것은 아름다운 의미로 가득 찼다가도 아무 것도 아닌 것이 된다. 갑자기 나는 내가 이 땅 위에 서있을 하나의 이유도 찾지 못하기도 한다.
오늘은 심장이 천천히 뛴다. 어쩌면 이것은 단순히 나의 심장의 문제일까. 나의 신경전달물질의 문제일까. 너무 구린 일이다. 나는 내 심장이 일정한 속도를 맞출 수 있도록 애를 쓰고 있다. 토마토랑 가지랑 양파랑 마늘이랑 구워먹고. 나는 어쩌면 이렇게 평생 불안과 허무를 오가며 살 것이다. 물론 그것이 행복한 각성일 때도 심심한 평안일 때도 있겠지만 결국에는 그것과 그것이다. 내가 세상의 모든 일에 의문을 그치는 날이 그것들에서 처량함을 발견하는 일을 그치는 날이 모든 불안과 기쁨이 그치는 날이 나의 죽음일 것이다. 어제는 눈물이 났지만 오늘같이 이렇게도 심심한 평안과 허무에서 그치는 것에 감사함 날도 있다는 것을.
목요일, 12월 01, 2016
차이
잠이 안온다
다시는 차이를 먹지 말아야지
속상하고 무서워죽겠다
너무 불안해서 말이 생각나질 않는다
천원짜리 종이한장의 색깔을 바라보며 지내는 나날들이다. 날짜를 착각한 탓에 무너진 가슴안고 눈물 찔끔했지만 오지은이 일깨워줬다. 쓰레기통에 버렸던 것을 다시 꺼내왔다. 다시 나에게는 일주일치의 희망이 생기고 아니 희망이 아니라 확신에 가까운 주문이자 선언이다.
누가 천만원만 줬으면 좋겠다ㅎ 누군가 했던 그 말을 내가 하게 될 줄이야. 내 꿈이 명확해질 때마다 절망도 커진다. 현실은 더욱 비극적이고 잔인해진다. 이렇게 간절해질 수가 있을까. 허무의 중간에서 내가 다시 기도를 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기도는 허공을 향하고 있다. 그 어느 공간도 이보다 깊고 넓지 못하리. 그 어느 때보다도 간절할 수 없지만 그 어느 때보다 무기력할 수도 없다. 끝도 없이 펼쳐진 암흑의 허공이다. 메아리가 존재하지 않는 우주다. 다 이게 무엇인지. 두려움만이 나의 현실이다. 이 세상에서 가장 명확하고 예외가 없는 것은 죽음뿐이다. 내가 발견할 수 있는 실재가 죽음뿐이라니 이 사실에 반드시 의미가 있을 것이다. 그렇지 않고서는 내가 사진을 찍는 이유가 없을 것이다. 끊임없이 죽음을 생산해내는 것. 끊임없는 이 확실성에 대한 활동이야말로 무엇이든간에 탐구하고자 하는 인간 욕망의 근거인 것이다. 이제 눈이 감긴다. 이 글을 다 쓰고나면 내가 편히 잠들 수 있기를 바라고 있던 중이다.
수요일, 10월 26, 2016
lundi
아무에게도 내가 무엇을 하는지 알리고싶지 않았으나 내가 뜻하지 않더라도 어디에서든 누구라도 마주칠 수가 있었다. 뜻하지 않게 나는 내 안녕를 전하고 내 근황에 대해 이야기했다.
내가 없는 자리에서 다른 사람들이 내 이야기 하는 것을 워낙에 싫어하기 때문에 되도록이면 피한다. 숨기고싶은 것은 아니고 다만 널리 밝히고싶지 않은 것이었다. 결과적으로 내가 자주보는 사람들을 제외하고는 내가 무얼하고 사는지 아는 사람들이 정말 별로 없었다.
어제 늦게까지 일을 하고 집으로 가던 길에 힘이 들어 마을버스를 타고 가기로 했다. 나는 축 쳐진 옷가지를 입고 축쳐진 머리카락과 축쳐진 어깨와 축쳐진 걸음으로 버스에 오르려는데 오랜만에 선배를 만났다. 같은 버스를 타고 언덕을 오르는 동안 나는 내가 의도치 않았지만 무얼하고 오는 길인지 어떻게 지내는지에 대해서 아주 간단하게 밝히게 된 것이다. 언덕길에 자잘자잘하게 붙어있는 그 정류장들을 지나는게 얼마나 시간이 걸리겠느냐고. 아주 작은 시간동안에 간략하게 내 근황을 알리고보니 듣는 사람 입장에선 참으로 딱하게 들릴 이야기였던 것이다. 최근 변화된 내 삶에 대해 안타깝게 생각한적은 없었는데 이상하게 그가 진심어린 목소리로 괜찮냐는 질문을 하며 안쓰럽다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자 나는 갑자기 눈물이 쏟아질 뻔한 것이다. 어이가 없었다. 갑자기 나는 서러워졌다. 희망을 갖고 하루하루 살아가고 있기는 했지만 아주 절망적이었다. 그래 희망은 있지만 절망적일 수도 있는 것이지. 아주 고되다. 너무 짜증이 나고 이따금씩은 화도 난다. 글도 쓰기가 싫어졌다. 게다가 이건 내가 원래 쓰던 글같지도 않다. 아주 가짜같고 똥이다. 그 전의 것들도 똥이기는 했지만. 아무래도 나는 자기연민에서 빠져나올 수가 없나보다.
토요일, 10월 22, 2016
모기
내 수면장애의 주원인.
시월 중순이 지나가는데 내 방에 모기가 한창이다. 정말 이상하네. 어딘가에 알을 깠는지도 모르는 일이다.
모기알, 바퀴벌레알, 코딱지만한 그 알들은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괴롭다.
그런데 참. 오랜만에 글을 쓰려고 하니 어색하다.
그렇다고 내가 불어로 완벽한 문장들을 구사한 것도 아니었다. 공부를 계속 해오긴 했으나 요 근래에 특히 집중을 하긴 했으니 이런 핑계라도 댈 수는 있겠지.
아무튼 단어들은 허공을 떠다니고 나는 엉성하게 그것들을 잡아끌고 있는 중이었다.
아귀에 힘만 들어가고, 다리를 떨고, 목소리는 나오지 않고.
오늘 밤은 모든 것이 이상하다.
아주 의미가 없는 글을 남긴다.
이제는 잠이 마구 쏟아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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