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친구의 프리 웨딩 촬영을 해주었다. 아침부터 모여서 뚝딱거리는 몸을 천천히 풀고, 점점 우리는 즐겁고 편안해졌다. 사랑과 웃음이 넘쳐났네. 누군가의 모습을 찍어주면서 오랜만에 느낀 행복과 뿌듯함. 이건 정말 소중하고 감사한 일이구나. 누군가의 소중한 시간을 계속해서 꺼내볼 수 있는 무언가로 기록을 해준다는 것이! 즐겁고 감사했다. 날씨도 너무 아름다웠고...! 정신없고 조금 피곤하기도 했지만 그 모든 것이 즐거웠다네. 시간은 유형의 것이구나.
집에 돌아오는 길에 정말 오랜만에 카마시 워싱턴의 the rhythm changes가 나왔는데, 재작년 4월이 떠오르면서 상쾌하고 기뻤다. 사랑하는 지량을 만났던 시간이 떠오르기도 했고, 오늘 친구와 친구의 연인을 보면서 큰 사랑과 편안함을 느끼고, 믿음을 느끼고, 두 얼굴에 서로의 얼굴을 담고 있는 것을, 서로의 시간을 담고 있는 것을 보면서 즐거웠네. 촬영을 하면서 하나둘씩 모인 친구들을 만나는 것도 너무 즐거웠어. 귀여워. 모두 사랑해. 우리 혜빈이와 용우 너무 축복해. 지은이, 문주, 윤슬, 가현이, 세희. 모두 사랑해.
금요일, 4월 26, 2024
수요일, 4월 24, 2024
갑자기 일기를 쓰는 일이 신성한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엄밀히 말하자면 일기를 쓰는 일이 아니라, 쓴 일기를 다시 읽는 일. 일기를 쓰고 있는 다른 날의 나를 그대로 만날 수 있는 시간이다. 시간은 직선이라는 착각 속에서 희미해지는 감각이 다시 보드랍고 유연한 공간에서 생생해진다.
밤 열한 시. 이즈음에 꼭 새벽녘에 꾸었던 꿈이 잘 떠오른다. 오늘은 버스에 앉아서 버스의 승객들을 찍는 사진작가를 만난 꿈을 꾸었다. 꽤 나이가 있고, 작품 활동을 많이 해온 유명한 작가였어서, 그 작업이 이제는 약간 허울만 남은 작업이 아닐까 하고 혼자 짐작하고 있었는데, 우연히 내가 탄 버스에 그 작가가 있었다. 나는 그 사람보다 앞에 앉아있었다. 아마 나도 사진에 찍힐 수 있는 자리였다. 나는 가운데 자리에 앉아있었다. 살짝 그가 어떻게 작업을 하는지, 어떻게 그 동네를 사는지를 알 수 있었다. 그는 동네 친구인지, 누군가의 이야기를 듣다가 울었다. 그 눈물을 보자, 언제나 그 마을버스를 타고 마을에 사는 사람들을 만나 이야기를 듣고, 그 모습을 찍는 그 작업이 순수하게 느껴졌다. 나는 내가 지레짐작하던 마음을 고쳐먹었다.
아아 졸려. 잠이 쏟아지려고 할 때, 지난 꿈이 떠오르는 것은 왜일까. 이 시간이 아닌 저 시간에 닿고 있어서 겹쳐지는 현상인 걸까. 재밌다.
밤 열한 시. 이즈음에 꼭 새벽녘에 꾸었던 꿈이 잘 떠오른다. 오늘은 버스에 앉아서 버스의 승객들을 찍는 사진작가를 만난 꿈을 꾸었다. 꽤 나이가 있고, 작품 활동을 많이 해온 유명한 작가였어서, 그 작업이 이제는 약간 허울만 남은 작업이 아닐까 하고 혼자 짐작하고 있었는데, 우연히 내가 탄 버스에 그 작가가 있었다. 나는 그 사람보다 앞에 앉아있었다. 아마 나도 사진에 찍힐 수 있는 자리였다. 나는 가운데 자리에 앉아있었다. 살짝 그가 어떻게 작업을 하는지, 어떻게 그 동네를 사는지를 알 수 있었다. 그는 동네 친구인지, 누군가의 이야기를 듣다가 울었다. 그 눈물을 보자, 언제나 그 마을버스를 타고 마을에 사는 사람들을 만나 이야기를 듣고, 그 모습을 찍는 그 작업이 순수하게 느껴졌다. 나는 내가 지레짐작하던 마음을 고쳐먹었다.
아아 졸려. 잠이 쏟아지려고 할 때, 지난 꿈이 떠오르는 것은 왜일까. 이 시간이 아닌 저 시간에 닿고 있어서 겹쳐지는 현상인 걸까. 재밌다.
일요일, 4월 21, 2024
나는 이제 죽는다. 온몸에 힘이 빠진다. 숨이 빠져나가고, 모든 긴장이 덜어지고. 아아. 사실 난 언제나 죽는 것이 두렵지 않았어. 죽고 싶은 마음이 가득했던 나날도 있었고, 혹은 죽어도 이제 여한이 없을 만큼 행복한 순간에 나는 그런 생각을 했었지. 그런데 이제 내가 정말로 죽는구나. 마음이 가벼워지고, 몸이 점점 가벼워진다. 나는 이렇게 가벼워지고 싶고,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았었나 봐. 이런 마음을 읽을 내 가족들에게 미안하지만, 알아줬으면 하는 마음이 크기도 했던 것 같아. 그렇게 마지막까지 남아있던 숨이 모두 빠져나가자 나는 이제 죽었다.
나의 장례식이 열린다. 우리 엄마가 보인다. 엄마는 온몸으로 울고 있다. 너무나 가엽고 불쌍하고 귀엽게 울고 있다. 내가 많이 보아왔던 모습이다. 가여운 우리 엄마는 나에게 연신 미안하다고 내가 불쌍하다고 말을 한다. 내가 아픈 것을 잘 알아주지 못해서 미안하다고 한다. 나는 엄마의 귀에다가 대고 ‘엄마 이제 다 괜찮아, 다 괜찮아. 정말 괜찮아.’라고 말한다. 아빠가 다가온다. 아빠는 뜨거운 얼굴로 눈물을 흘리며 나에게 미안하다고 말한다. 그동안 하지 못했던 모든 말들도 미안하다고, 사랑한다고, 미안하다고 정말 미안하다고 눈물을 흘린다. 나는 이제 아무렇지도 않아 아빠. 나는 아빠의 귀에다가 대고 말한다. “아빠, 나는 이제 괜찮아. 고마워 말해주어서.” 나는 마음이 편안하다. 그리고 내 동생들이 들어온다. 세상에서 제일 사랑하는 내 동생 오지은. 지은이도 눈물을 흘리며 정말 너무나도 슬픈 표정으로 내 앞에 선다. 나는 같이 눈물이 나온다. 너무너무 눈물이 난다. 내 사랑하는 동생 지은이. 너무너무 사랑하는 내 동생 지은이. 지은이가 있었기 때문에 나는 몇 번이고 다시 살 수 있었고, 너무나 재미있고, 언제나 위안이 되었다. 지은아 고마워. 나는 지은이에게 말한다. 너무너무 사랑한다고, 너무너무 고마웠다고, 정말 정말 보고 싶다고. 그리고 그 옆에는 쪼르르 우리 귀여운 고양이들이 함께 있다. 미셸과 까미유. 나는 고양이들을 보며 가장 눈물이 많이 흐른다. 가여운 우리 아기들, 내가 우리 아기들보다 먼저 죽었네. 미안해. 더 많이 놀아주지 못해서 미안하고, 너무너무 사랑해. 너희들 덕분에 나는 사랑을 배웠어. 정말 정말 그 귀엽고 보드라운 털을 수천 번 더 쓰다듬고 싶고, 안아주고 싶고, 사랑스러운 향기를 맡고 싶다. 내가 다시 살 수만 있다면 미셸 몸에 내 얼굴을 파묻고 미셸과 함께 서로를 느끼고, 사랑을 느끼던, 내 몸과 마음이 온전해짐을 느끼던 그 어느날의 풍경으로 다시 가고 싶다. 하지만 이제 그럴 수가 없다는 사실이 가장 슬프구나.
그리고 이제 나의 반려자, 지량이 보인다. 지량은 너무나 슬퍼하고 있어. 나는 가슴이 너무 아프다. 지량에게 너무 미안하다. 하지만 지량도 내게 미안해한다. 지량은 내게 미안하다고 말하며 운다. 우리가 함께 있는 시간이 이렇게 짧을 줄 몰랐다. 나는 지량을 안아주고 지량에게 괜찮다고 말을 한다. 지량이 너무 심하게 아프지 않았으면 좋겠다. 행복하게 살았으면 좋겠어. 너무너무 사랑해.
가족들과 친구들을 모두 만났다. 모두 나에게 생전에 내가 듣기 좋아했던 말을 해주었고, 그동안 하지 못했던 이야기를 쏟아내기도 했다. 나는 그 모든 것을 듣는 것이 좋았다. 그 모든 것을 듣자 나는 편안해졌다.
관 속에 뉘인 나는 이제 화장터로 왔다. 이제 곧 불이 켜질 것이고, 나의 육체는 정말로 사라진다. 우리 엄마가 너무 심하게 울고 있다. 가여운 우리 엄마. 가족들이 우리 엄마를 안아주고 있다. 고양이들은 영문을 모른채 함께 있다. 하지만 함께 있어서 나는 더 행복하다. 이제 불이 켜진다. 내 몸이 서서히 사라진다. 나의 머리카락이 다 사라지고, 살결이 모두 사라지고. 이제 나는 뼈만 남았다. 그리고 이제 이 뼈들도 가루가 되었다. 나는 이제 가루가 되어 예쁜 그릇에 담긴다.
가루가 된 나를 가족들이 물이 있고, 풀도 있는 아름다운 풍경에 데리고 가서 뿌려준다. 나는 공기 중에 흩어진다. 나는 이제 정말 모든 먼지들과 바람과 하나가 되어 세상을 자유롭게 날아다닌다. 나는 너무나 자유롭다. 편안하다. 나는 더 멀리 멀리 날아 태양에 가 닿는다. 너무나 밝고 뜨거운 태양에 가 닿는다. 나는 태양의 한 조각이었다. 그게 본디 나의 모습이었다. 그리고 모두 다 본디 이 태양의 이 따스함의 한 조각이었음을 안다. 우리 엄마, 아빠, 지은이, 지량, 미셸, 까미유…. 모두가 결국에는 태양의 조각들로 돌아와 나와 하나가 됨을, 나와 원래 하나였음을 우리는 하나임을 안다. 그 사실을 알게 되자 나는 이제 정말로 이 세상에 조금이나마 남겨둘 뻔한 아쉬움과 미안함이 모두 덜어진다. 아쉬울 것이 없었고, 슬퍼할 일도 아니었구나. 모든 존재가 다 나였고, 다 우리였다. 내가 너무 사랑하던 존재들도, 내가 미워하던 존재와 내가 용서할 수 없을 것만 같았던 존재까지도.
나는 완전하게 죽고, 태양의 한 조각이 되자, 내가 이 모든 것을 깨닫게 되자 태양은 나에게 또다시 돌아갈 기회를 준다. 나는 다시 내 가족들의 품으로 돌아갈 수 있게 된다. 나는 그러자 본디 태양의 한 조각인 내가, 이 뜨겁고도 밝은 존재인 내가 이 세상에서 다시 무엇을 할 수 있는 사람인지 알았다. 나는 이 밝음과 뜨거움을 사람들에게 알려주고 전해주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그렇게 나는 다시 태어난다. 다시 내 몸이 내 가족의 품으로 돌아오고, 내 몸에 숨이 가득해진다. 나는 다시 태어났다. 나는 태양의 한 조각임을 기억한 채로 다시 돌아왔다. 나는 더 밝고 더 아름답고 사랑이 가득한 존재임을 안다. 나는 다시 태어났다.
나의 장례식이 열린다. 우리 엄마가 보인다. 엄마는 온몸으로 울고 있다. 너무나 가엽고 불쌍하고 귀엽게 울고 있다. 내가 많이 보아왔던 모습이다. 가여운 우리 엄마는 나에게 연신 미안하다고 내가 불쌍하다고 말을 한다. 내가 아픈 것을 잘 알아주지 못해서 미안하다고 한다. 나는 엄마의 귀에다가 대고 ‘엄마 이제 다 괜찮아, 다 괜찮아. 정말 괜찮아.’라고 말한다. 아빠가 다가온다. 아빠는 뜨거운 얼굴로 눈물을 흘리며 나에게 미안하다고 말한다. 그동안 하지 못했던 모든 말들도 미안하다고, 사랑한다고, 미안하다고 정말 미안하다고 눈물을 흘린다. 나는 이제 아무렇지도 않아 아빠. 나는 아빠의 귀에다가 대고 말한다. “아빠, 나는 이제 괜찮아. 고마워 말해주어서.” 나는 마음이 편안하다. 그리고 내 동생들이 들어온다. 세상에서 제일 사랑하는 내 동생 오지은. 지은이도 눈물을 흘리며 정말 너무나도 슬픈 표정으로 내 앞에 선다. 나는 같이 눈물이 나온다. 너무너무 눈물이 난다. 내 사랑하는 동생 지은이. 너무너무 사랑하는 내 동생 지은이. 지은이가 있었기 때문에 나는 몇 번이고 다시 살 수 있었고, 너무나 재미있고, 언제나 위안이 되었다. 지은아 고마워. 나는 지은이에게 말한다. 너무너무 사랑한다고, 너무너무 고마웠다고, 정말 정말 보고 싶다고. 그리고 그 옆에는 쪼르르 우리 귀여운 고양이들이 함께 있다. 미셸과 까미유. 나는 고양이들을 보며 가장 눈물이 많이 흐른다. 가여운 우리 아기들, 내가 우리 아기들보다 먼저 죽었네. 미안해. 더 많이 놀아주지 못해서 미안하고, 너무너무 사랑해. 너희들 덕분에 나는 사랑을 배웠어. 정말 정말 그 귀엽고 보드라운 털을 수천 번 더 쓰다듬고 싶고, 안아주고 싶고, 사랑스러운 향기를 맡고 싶다. 내가 다시 살 수만 있다면 미셸 몸에 내 얼굴을 파묻고 미셸과 함께 서로를 느끼고, 사랑을 느끼던, 내 몸과 마음이 온전해짐을 느끼던 그 어느날의 풍경으로 다시 가고 싶다. 하지만 이제 그럴 수가 없다는 사실이 가장 슬프구나.
그리고 이제 나의 반려자, 지량이 보인다. 지량은 너무나 슬퍼하고 있어. 나는 가슴이 너무 아프다. 지량에게 너무 미안하다. 하지만 지량도 내게 미안해한다. 지량은 내게 미안하다고 말하며 운다. 우리가 함께 있는 시간이 이렇게 짧을 줄 몰랐다. 나는 지량을 안아주고 지량에게 괜찮다고 말을 한다. 지량이 너무 심하게 아프지 않았으면 좋겠다. 행복하게 살았으면 좋겠어. 너무너무 사랑해.
가족들과 친구들을 모두 만났다. 모두 나에게 생전에 내가 듣기 좋아했던 말을 해주었고, 그동안 하지 못했던 이야기를 쏟아내기도 했다. 나는 그 모든 것을 듣는 것이 좋았다. 그 모든 것을 듣자 나는 편안해졌다.
관 속에 뉘인 나는 이제 화장터로 왔다. 이제 곧 불이 켜질 것이고, 나의 육체는 정말로 사라진다. 우리 엄마가 너무 심하게 울고 있다. 가여운 우리 엄마. 가족들이 우리 엄마를 안아주고 있다. 고양이들은 영문을 모른채 함께 있다. 하지만 함께 있어서 나는 더 행복하다. 이제 불이 켜진다. 내 몸이 서서히 사라진다. 나의 머리카락이 다 사라지고, 살결이 모두 사라지고. 이제 나는 뼈만 남았다. 그리고 이제 이 뼈들도 가루가 되었다. 나는 이제 가루가 되어 예쁜 그릇에 담긴다.
가루가 된 나를 가족들이 물이 있고, 풀도 있는 아름다운 풍경에 데리고 가서 뿌려준다. 나는 공기 중에 흩어진다. 나는 이제 정말 모든 먼지들과 바람과 하나가 되어 세상을 자유롭게 날아다닌다. 나는 너무나 자유롭다. 편안하다. 나는 더 멀리 멀리 날아 태양에 가 닿는다. 너무나 밝고 뜨거운 태양에 가 닿는다. 나는 태양의 한 조각이었다. 그게 본디 나의 모습이었다. 그리고 모두 다 본디 이 태양의 이 따스함의 한 조각이었음을 안다. 우리 엄마, 아빠, 지은이, 지량, 미셸, 까미유…. 모두가 결국에는 태양의 조각들로 돌아와 나와 하나가 됨을, 나와 원래 하나였음을 우리는 하나임을 안다. 그 사실을 알게 되자 나는 이제 정말로 이 세상에 조금이나마 남겨둘 뻔한 아쉬움과 미안함이 모두 덜어진다. 아쉬울 것이 없었고, 슬퍼할 일도 아니었구나. 모든 존재가 다 나였고, 다 우리였다. 내가 너무 사랑하던 존재들도, 내가 미워하던 존재와 내가 용서할 수 없을 것만 같았던 존재까지도.
나는 완전하게 죽고, 태양의 한 조각이 되자, 내가 이 모든 것을 깨닫게 되자 태양은 나에게 또다시 돌아갈 기회를 준다. 나는 다시 내 가족들의 품으로 돌아갈 수 있게 된다. 나는 그러자 본디 태양의 한 조각인 내가, 이 뜨겁고도 밝은 존재인 내가 이 세상에서 다시 무엇을 할 수 있는 사람인지 알았다. 나는 이 밝음과 뜨거움을 사람들에게 알려주고 전해주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그렇게 나는 다시 태어난다. 다시 내 몸이 내 가족의 품으로 돌아오고, 내 몸에 숨이 가득해진다. 나는 다시 태어났다. 나는 태양의 한 조각임을 기억한 채로 다시 돌아왔다. 나는 더 밝고 더 아름답고 사랑이 가득한 존재임을 안다. 나는 다시 태어났다.
금요일, 4월 19, 2024
해의 사람
해가 지고 나니 쭈욱 에너지가 빠져 버렸다. 정말이지 나는 해가 떠 있을 때에 더욱 에너지가 활발한 사람인가 보다. 나는 해가 떠 있는 동안에 중요한 것들을 하고, 식사를 하는 것이 좋다고 했는데, 요즘 그 내용을 더욱 체감하는 것 같다.
오늘 내가 좋아하는 부숭부숭하고 알록달록한 예쁜 털실들을 꺼내 꼬아서 뭔가를 만들었다. 화분을 꾸미고 싶었는데 한참 걸려 만들었건만 화분에 맞지 않았다. 지량에게 줬다. 아무 생각 없이 막 시작했는데, 오랫동안 앉아서 만들었다. 밝은 햇빛을 느끼면서. 나는 그 느낌이 좋아서 계속 해가 떠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을 했다. 지량은 더 길어질 거라고 말해주었다. 프랑스에 있을 때를 생각했다.
나는 해의 사람이라고 생각하며 일기를 쓴다.
난 요즘 활기를 되찾았다. 스트레스를 주는 것들이 몇가지 있지만, 꽤 만족스러운 삶을 살고 있다. 작업만 잘된 다면 아주 정말이지 완벽할 것 같은 나날들이다. 하지만 꼭 그것이 완벽을 이루어주는 것은 아닐거야. 쓰고 나니 그렇다. 저녁이 되고 힘이 쭉 빠져서 저녁을 먹고는 넋을 잠깐 놓고 있었는데, 감자칩을 먹고 다시금 힘을 내는 중이다. 주절주절- 다 끄집어내고, 풀어내는 일기를 언제든 쓰고 싶은 마음이 있었는데, 넋을 놓고 있었던 것치고는 꽤 손가락이 잘 움직여주고 있다. 요즘 말을 할 때, 주저하게 되는 부분이나 끊기는 부분들이 많이 줄어들었다. 마음과 머리의 논지가 명확해지고 있는 것 같아서 기뻐졌다. 열심히 말을 꺼내고 만들어내고 싶어. 나는 다시 할 수 있을 거야. 나는 언제든 다시 할 수 있어.
오늘 내가 좋아하는 부숭부숭하고 알록달록한 예쁜 털실들을 꺼내 꼬아서 뭔가를 만들었다. 화분을 꾸미고 싶었는데 한참 걸려 만들었건만 화분에 맞지 않았다. 지량에게 줬다. 아무 생각 없이 막 시작했는데, 오랫동안 앉아서 만들었다. 밝은 햇빛을 느끼면서. 나는 그 느낌이 좋아서 계속 해가 떠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을 했다. 지량은 더 길어질 거라고 말해주었다. 프랑스에 있을 때를 생각했다.
나는 해의 사람이라고 생각하며 일기를 쓴다.
난 요즘 활기를 되찾았다. 스트레스를 주는 것들이 몇가지 있지만, 꽤 만족스러운 삶을 살고 있다. 작업만 잘된 다면 아주 정말이지 완벽할 것 같은 나날들이다. 하지만 꼭 그것이 완벽을 이루어주는 것은 아닐거야. 쓰고 나니 그렇다. 저녁이 되고 힘이 쭉 빠져서 저녁을 먹고는 넋을 잠깐 놓고 있었는데, 감자칩을 먹고 다시금 힘을 내는 중이다. 주절주절- 다 끄집어내고, 풀어내는 일기를 언제든 쓰고 싶은 마음이 있었는데, 넋을 놓고 있었던 것치고는 꽤 손가락이 잘 움직여주고 있다. 요즘 말을 할 때, 주저하게 되는 부분이나 끊기는 부분들이 많이 줄어들었다. 마음과 머리의 논지가 명확해지고 있는 것 같아서 기뻐졌다. 열심히 말을 꺼내고 만들어내고 싶어. 나는 다시 할 수 있을 거야. 나는 언제든 다시 할 수 있어.
아침마다 일어나서 수리야나마스카라를 해야지. 하고 싶다는 마음은 늘 있었지만, 일기에 쓰며 한번 다짐해 본다. 태양의 기운을 듬뿍 받아서 저녁까지 에너지를 골고루 써야지.
화요일, 4월 16, 2024
토요일, 4월 13, 2024
이불 속에 들어갔다. 문득 준비하고 있는 전시와 관련해서 줄 하나를 꼬았다. 이불을 덮는 것. 이불 속의 나를 만나는 것. 작업 생각이 문득 떠오르긴 했지만, 금방 그것을 흘려보내고, 다시 나는 내가 가기로 한 시간으로 다가갈 수 있었다.
이불 속에 있는 나를 만나러 가는 일은 어렵지 않다. 내가 이불 속에 덩어리진 채로 보이는 것은 그래도 어렵지 않은가 보다. 지난 명상에서 나를 만나러 갔을 때에는 아무런 이야기를 할 수 없었다. 어떻게 소리가 전달되는지, 어떻게 마음이 전달되는지도 알 수 없었다. 무언가 나를 거부하고 밀어내는 느낌은 아니었으나 아직 완전히 닿지 않은 것 같았다. 오늘 다시 그 상태를 느끼다가, 나는 이불 속으로 들어가기로 했다. 여전히 나의 얼굴은 보이지 않는다. 나에게 말을 걸기 위해 이런저런 방식들을 고민하다가, 어쩌다 보니 무엇을 원하는지 들을 수 있었다. 내게 '언니가 어떻게 좀 해봐'라고 내가 말했다. 나는 알겠다고 하고, 이불을 박차고 나와 엄마에게 가서 말했다.
엄마, 지금은 밤이야. 너무 늦었어. 너무 시끄럽고, 무서워. 나는 잠을 자고 싶어. 편안하게.
엄마는 내게 미안하다고 했다. 하지만 아빠가 힘들게 하는 것은 어쩔 수가 없는 듯이 보였다. 그러고 보니, 아빠에게도 뭐라고 나는 말을 해야 했다. 하지만 아빠가 만나지지 않는다. 아빠의 얼굴이 나타나지 않는다. 항상 엄마 너머로 어떤 목소리 혹은 어떤 이미지로만 아빠가 존재한다. 그러고 보니 내가 중곡동에 살던 시절에 집에서의 아빠 얼굴이 정말 많이 없다는 것이다. 이 일지를 쓰는 동안 갑자기 몇 가지 기억이 떠오르긴 해서 다행이라 여겨진다. 아무튼, 어떻게 좀 해보라는 말을 건넬 아빠가 명상하는 동안에는 떠오르지 않았고, 만나지지가 않았다. 나는 아빠에게 수화기 너머로 말하듯 말했다. 우리가 너무 힘들다고, 어떻게 좀 해보라고. 어디에 있는 거냐고. 나타나라고. 아무튼 오늘은 내가 어떤 행동을 할 수 있었다. 말을 할 수 있었고. 이것이 다른 시간의 나와 대화하는 법인 걸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불 속의 나는 항상 답답하고, 숨이 잘 쉬어지지 않고, 덥다. 이불 밖 켜진 불빛이 느껴진다. 소리가 들린다. 이불 밖에서 나는 잠들어 있지만, 이불 안에서 나는 깨어있다.
약 30분간 시간을 보냈다. 오늘은 왠지 누워서 온몸의 가지들을 완전히 이완하면서도 명료한 의식으로 명상을 할 수 있었다. 싱잉볼 소리를 듣는 동안에는 나도 모르게 자연스레 목이 꺾이었는데, 아마도 목의 앞부분에서 무언가가 정화되는 것 같았다. 목 근육들이 조금 부드러워진 것 같다. 30분간 시간을 보내고, 오늘 이불 속의 나와의 만남은 여기서 정리되는 것이 느껴졌다. 다음에는 아마 더 많은 것을 말하거나 해낼 것 같다. 그리고 아마 또 다른 시간 속에 존재하게 될 것임을 느낀다.
수요일, 4월 10, 2024
용서를 배우기 위해서, 핍박받고 차별당하는 현실을 체험했어.
요즈음 그런 생각을 했다. 핍박받고 차별당하며 느낀 두려움과 분노의 감정들, 그것들을 해소하고 정화하기 위해서 그런 현실을 체험한 것이 아니라, 어쩌면 용서를 배우고 양보를 배우기 위해, 자비를 배우기 위해 그런 현실을 창조한 것이라고.
지나가는 차들이 걸어가는 사람들과 자전거 타는 사람들을 꼭 차로 받을 것처럼 지나가고, 꼭 위협하는 것처럼, 그렇게 행동하는 사람들을 보면서 너무나 화가 나는 한편, 얼마나 조급하고 좁은 마음들이 저런 행동을 하게 하는 것일까-하는 생각이 들면서, 갑자기 내가 지나온 모든 화가 나는 현실들이 어쩌면 내가 진정으로 이 생에서 용서를 배우기 위해서 창조된 것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감정을 느끼는 것이 가장 큰 목표가 아니라 말이다. 감정을 느끼고, 온전히 그것을 느끼고 분노가 사라지고 나면 그때 우린 용서를 하게 될 거야. 그것이 어쩌면 결국에 우리가 해야 하는 일인 거야.
기쁜 것도 슬픈 것도 느끼지 않는 상태란, 모든 것에 무감해지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을 일어난 그대로 받아들이고, 떠나보낼 수 있는 상태를 말하는 것이겠지. 모든 것을 포기하는 것. 바가바드기타에서 일어나는 일. 그것이 그런 말일 거야. 지겨웠던 구절들이 지나가고 밭과 밭을 아는 것에 대해서 배운다.
화요일, 4월 02, 2024
천혜향 두 개를 와라라 먹었다. 너무너무 상큼하고 너무너무 맛있어. 달콤해. 참으로 만족스러워. 일기를 쓰려고 했는데, 마침 천혜향을 먹고 너무 만족스러워 이 문장으로 일기를 시작한다.
쓰고 싶은 말들이 가끔씩 한마디씩 혹은 한 단어씩 혹은 한 이미지씩 있었다. 조각인지 뭉텅이인지 모으기가 힘들어서 한동안 아무것도 쓰지는 못하였다. 오늘은 그나마 손가락을 움직일 수가 있어서 써보기로 한다. 하지만 이 문장을 쓰자고 바로 또 한 이십 분 동안 다른 곳을 배회하다가 돌아왔다.
오늘 무언가를 쓰고 싶다는 생각과 사진을 펼쳐 보이고 싶다는 마음이 들었는데…. 무언가를 쓰고 싶다는 마음을 불러일으킨 것은 '극복'이라는 단어 때문이었다. 장애와 관련한 교육 영상을 볼 일이 있었는데, 장애를 무의식적으로 부정적인 단어와 연결 지어 표현하는 것을 지양할 수 있도록 적절치 못한 표현을 짚어주고 있었다. 흔히들 쓰는…. 표현 "'장애를 극복하고' ---을 해낸다."와 같은 말을 예시로 설명하고 있었다. 사실 익히 알고 있는 내용이었지만, 갑자기 그 설명에 깊이 공명했다. 장애는 질병과 같이 고쳐져야 하는 어떤 상태가 아니라 고착된 한 특성이므로, '극복한다'라는 표현과 함께 쓸 수 없는 말이었다.
그 설명을 들으며 나는 내가 주기적으로 겪는 어떤 상태를 떠올렸다. 나는 활기차고 밝고 명랑하게 지내다가도, 어떤 기간에는 느리고 어둡고, 힘이 없어진다. 내가 이제껏 '정상적인', '원래의' 나의 상태로 지내다가 아주 어쩌다가 내가 힘들고 지치게 되면, 우울의 시기가 찾아온다고 표현하곤 했는데, 그래서 나에게 찾아오는 그 우울의 상태는 항상 너무나 힘들고, 나뿐만 아니라 모두를 힘들게 하고 반드시 극복해야만 하는 어떤 상태였고, 그것은 나의 질병이었다. 때문에 그 시기의 나는 나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리고 내가 요즘 가장 두렵고도 괴롭고 싫은 것은 내가 오늘 나의 우울을 치료한다고 하더라도, 다시 언젠가 또 지친 몸에 우울이 찾아올 수도 있다는 사실이었다. 지금껏 살아온 날들이 너무 힘들었기에, 그 괴로운 시기를 몇 번 겪고 나니까 그것들을 다시는 경험하고 싶지 않은 것이다. 다시 치료가 필요해지는 상태를 말이다. 이상하게 이번에 치료를 진행하는 중에 갑자기 내가 많이 힘들어졌다. 3월 한 달 동안에. 급격히 약간 힘겨워진 것 같다. 어찌저찌 약간 지친 나를 가누어보려고 했는데, 3월은 그러다가 금세 지나간 것 같다. 3월의 모든 꿈도 그러하고. 아무튼, 이 상태는 나에게 극복되어야 할 상태였다. 이때의 나는 내가 아니고, 이 상태의 내가 하는 생각과 말은 크게 중요하거나 어떤 효력이 있지도 않다고 생각했고 말이다.
그치만 우울의 상태가 찾아오는 시기를 예측하거나 대비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그것이 어떤 뚜렷한 형태와 규칙을 갖는 것도 아니긴 하지만, 평생 내가 그것을 몇 번이고 마주해왔다면, 평생 몇 번이고 마주할 수 있는 질병이라면, 그것이 질병이라 할지라도 어쩌면 그것은 내가 가진 어떤 한 특성일 수 있지 않을까. 그것이 나를 이루는 어떤 특성이지 않을까. 힘이 쭉 빠져서 슬프고, 무감하고, 바보 같고, 불안한 내가 사는 그 시기도 온전한 나를 이루는 한 부분이지 않을까. 그럼 내가 언제든 찾아올 수 있는 이 나의 상태를 극복해야 하는 상태가 아니라, 내가 가진 하나의 특성으로 받아들이고 그 특성에 맞게 나를 잘 다루어가며 살아가야 하는 것이 아닐까.
바로 지난 일기에만 해도 내가 '극복'이라는 단어를 썼더라. 근데 무언가를 언제나 극복해야만 하는 건 아닌가 봐. 내가 겪는 폭력적이고 비관적인 사고와 감정의 상태도 나의 한 부분일 뿐이었다. 고치고 뜯어내어 없는 것으로 만들 것은 아니었다. 나는 수많은 모습의 나로 이루어져 있고, 그 중에 나를 살리고 싶은 나와 나를 죽이고 싶은 나도 있을 뿐이다. 그 각각의 파동들이 나에게 다가올 때 나는 그들에 맞는 움직임으로 살면 되는 것이야. 힘이 없을 때는 힘없이 지내다 보면 다시 힘이 나는 시기가 오겠지. 그걸 도와주는 약이 있을 수도 있고, 선생님이 있을 수도 있고, 친구가 있을 수도 있고... 이렇게 생각하니 또 우울이 찾아오면 어쩌지-하는 두려움은 이제 가벼워졌다. 극복해야 할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니 가벼워지네. 요즘 포켓몬고에 빠진 나를 지량은 그냥 그렇게 빠져있도록 내버려둔다. 그 상태가 평생의 상태가 아니니까, 빠져있다가 다시 또 다른 것으로 빠지는 순간이 온다는 것을 아니까. 지량이 하는 말들이 그런 말이었다. 극복해야 할 무언가가 아니라는 것.
신기하게도 내가 어제인지 그제인지... '연약한'이라는 말에 대해서 또 곰곰이 생각하며, 하고 싶은 말이 조금씩 튀어나올 것 같았는데, 오늘 공명한 이 내용들과 닿아 드디어 이어졌다. 아마 울고 있는 나를 위로해 주고자 지량이 한 말이었던 것 같은데…. 나는 원래 강한 사람이라고. 그랬어. 그 말을 들으며 나는 내 이름을 떠올렸다. 내 이름은 세라야. 강해지라고 아빠가 그렇게 지었대. 세지라고. 세라. 그래서 나는 그래 맞어 나 원래 강한 사람인데 내가 왜 그러지- 하는 생각에 잠시 빠졌다가, 바로 내가 평생 잊지 못하는 친구의 말 하나를 또 떠올렸다. 내가 너무 유리 심장이라 망할 것 같다고 했던 말. 나는 그 말이 평생 원망스러웠고, 내가 연약하고 내가 소심하다고 느껴질 때 종종 그 말을 떠올리곤 했다. 그건 나를 다시금 강하게 움직이게 하는 어떤 원동력이 되기도 했지만, 때로 나 자신을 자책하는 말로 맴돌기도 했다.
그걸 나는 또 하루 종일 생각했다. 근데, 연약한 것은 꼭 죽나? 연약한 것은 꼭 망할까? 아니야. 연약한 것도 산다. 연약한 것도 다 해낼 수 있어. 연약한 것도 연약한 방식으로 살어. 연약한 것이 누군가를 구할 수도 있고, 사랑할 수도 있어. 그래서 나는 늘 연약한 것들을 위해 소리치는 사람이 되고 싶기도 했고, 그렇게 소리치는 생명들을 사랑하기도 했고 말이다. 장루이 선생님이 내 작업을 보며 'précaire'라는 단어를 알려주셨다. 그건 '연약한'이라는 뜻의 불어 단어다. 내 사진들에서 연약함을 보셨다. 그게 장면들이 녹아내리고 뭉쳐져서 그런 연약하고도 여리여리한 색감과 이미지를 만들어내고 있기도 했지만, 실제로 그것들을 통해 나는 모든 것들을 그렇게 연약하게 바라보고 싶기도 했고. 아무튼, 그 말을 듣고 나는 또 내 사진이 아니라 연약한 나 자신이 떠올라 눈물을 흘려버렸는데, 장루이쌤이 정말 당황해하셨다. 장루이쌤은 내 사진 속에서 연약함을 보시는 거지, 내가 연약한 것이 아니라고 말씀해주셨고, 또 연약하다는 뜻의 그 단어가 나쁜 것이 아니라고 거듭 말씀해주셨다. 나는 그게 무슨 말인지 아는데 그냥 눈물이 났다. 너무 웃겨. 그 날의 단어가 오늘 드디어 이어진다. 나의 이야기로. 오늘 나의 발견으로.
연약한 것은 연약해서 망하거나 죽는 게 아니야. 모든 것이 죽듯이 죽고, 모든 것이 살듯이 살어. 연약한 것은 연약하게 살면 돼. 강한 것은 강하게 살면 되고 말이야. 너무 웃기게도 나는 바로 또 포켓몬들을 떠올린다. 아아- 그래서 내가 포켓몬고를 하게 된 것인가 봐. 진짜 진짜 보기에도 강하고, 실제 능력치도 강력한 포켓몬들이 있는가 하면, 정말 이런 애가 어떻게 살아가지-싶을 정도로 연약하고 아무와도 싸우지 못할 것처럼 생긴 포켓몬들이 있다. 꼬지모같은 애들. 나뭇가지가 웃고 있는데 아무도 해치지 못할 것처럼 생겼어. 너무 하찮아서 귀여운 아이. 그런 애들이 많다. 하지만 모두가 각자의 특성으로 각자의 방식으로 살고 싸운다. 게을킹은 게으름으로 싸우고, 질뻐기는 오물을 던지면서 싸운다. 그러고 보니까 정말 웃기네. 포켓몬고를 내가 갑자기 시작하게 된데도 이유가 있었나 봐. 너무 웃겨. 불현듯 시작하여, 힘이 쭉 빠진 기간 동안 급격히 많이 했는데, 그 각자의 능력치와 특성들을 보는 게 요즘 나의 재미였거든. 하여간... 참 이런 내가 웃겨.
천혜향 두 개를 와라라 먹고 시작한 일기를 쓰다가 하나를 더 먹었어. 천혜향 세 개로 쓴 일기.
쓰고 싶은 말들이 가끔씩 한마디씩 혹은 한 단어씩 혹은 한 이미지씩 있었다. 조각인지 뭉텅이인지 모으기가 힘들어서 한동안 아무것도 쓰지는 못하였다. 오늘은 그나마 손가락을 움직일 수가 있어서 써보기로 한다. 하지만 이 문장을 쓰자고 바로 또 한 이십 분 동안 다른 곳을 배회하다가 돌아왔다.
오늘 무언가를 쓰고 싶다는 생각과 사진을 펼쳐 보이고 싶다는 마음이 들었는데…. 무언가를 쓰고 싶다는 마음을 불러일으킨 것은 '극복'이라는 단어 때문이었다. 장애와 관련한 교육 영상을 볼 일이 있었는데, 장애를 무의식적으로 부정적인 단어와 연결 지어 표현하는 것을 지양할 수 있도록 적절치 못한 표현을 짚어주고 있었다. 흔히들 쓰는…. 표현 "'장애를 극복하고' ---을 해낸다."와 같은 말을 예시로 설명하고 있었다. 사실 익히 알고 있는 내용이었지만, 갑자기 그 설명에 깊이 공명했다. 장애는 질병과 같이 고쳐져야 하는 어떤 상태가 아니라 고착된 한 특성이므로, '극복한다'라는 표현과 함께 쓸 수 없는 말이었다.
그 설명을 들으며 나는 내가 주기적으로 겪는 어떤 상태를 떠올렸다. 나는 활기차고 밝고 명랑하게 지내다가도, 어떤 기간에는 느리고 어둡고, 힘이 없어진다. 내가 이제껏 '정상적인', '원래의' 나의 상태로 지내다가 아주 어쩌다가 내가 힘들고 지치게 되면, 우울의 시기가 찾아온다고 표현하곤 했는데, 그래서 나에게 찾아오는 그 우울의 상태는 항상 너무나 힘들고, 나뿐만 아니라 모두를 힘들게 하고 반드시 극복해야만 하는 어떤 상태였고, 그것은 나의 질병이었다. 때문에 그 시기의 나는 나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리고 내가 요즘 가장 두렵고도 괴롭고 싫은 것은 내가 오늘 나의 우울을 치료한다고 하더라도, 다시 언젠가 또 지친 몸에 우울이 찾아올 수도 있다는 사실이었다. 지금껏 살아온 날들이 너무 힘들었기에, 그 괴로운 시기를 몇 번 겪고 나니까 그것들을 다시는 경험하고 싶지 않은 것이다. 다시 치료가 필요해지는 상태를 말이다. 이상하게 이번에 치료를 진행하는 중에 갑자기 내가 많이 힘들어졌다. 3월 한 달 동안에. 급격히 약간 힘겨워진 것 같다. 어찌저찌 약간 지친 나를 가누어보려고 했는데, 3월은 그러다가 금세 지나간 것 같다. 3월의 모든 꿈도 그러하고. 아무튼, 이 상태는 나에게 극복되어야 할 상태였다. 이때의 나는 내가 아니고, 이 상태의 내가 하는 생각과 말은 크게 중요하거나 어떤 효력이 있지도 않다고 생각했고 말이다.
그치만 우울의 상태가 찾아오는 시기를 예측하거나 대비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그것이 어떤 뚜렷한 형태와 규칙을 갖는 것도 아니긴 하지만, 평생 내가 그것을 몇 번이고 마주해왔다면, 평생 몇 번이고 마주할 수 있는 질병이라면, 그것이 질병이라 할지라도 어쩌면 그것은 내가 가진 어떤 한 특성일 수 있지 않을까. 그것이 나를 이루는 어떤 특성이지 않을까. 힘이 쭉 빠져서 슬프고, 무감하고, 바보 같고, 불안한 내가 사는 그 시기도 온전한 나를 이루는 한 부분이지 않을까. 그럼 내가 언제든 찾아올 수 있는 이 나의 상태를 극복해야 하는 상태가 아니라, 내가 가진 하나의 특성으로 받아들이고 그 특성에 맞게 나를 잘 다루어가며 살아가야 하는 것이 아닐까.
바로 지난 일기에만 해도 내가 '극복'이라는 단어를 썼더라. 근데 무언가를 언제나 극복해야만 하는 건 아닌가 봐. 내가 겪는 폭력적이고 비관적인 사고와 감정의 상태도 나의 한 부분일 뿐이었다. 고치고 뜯어내어 없는 것으로 만들 것은 아니었다. 나는 수많은 모습의 나로 이루어져 있고, 그 중에 나를 살리고 싶은 나와 나를 죽이고 싶은 나도 있을 뿐이다. 그 각각의 파동들이 나에게 다가올 때 나는 그들에 맞는 움직임으로 살면 되는 것이야. 힘이 없을 때는 힘없이 지내다 보면 다시 힘이 나는 시기가 오겠지. 그걸 도와주는 약이 있을 수도 있고, 선생님이 있을 수도 있고, 친구가 있을 수도 있고... 이렇게 생각하니 또 우울이 찾아오면 어쩌지-하는 두려움은 이제 가벼워졌다. 극복해야 할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니 가벼워지네. 요즘 포켓몬고에 빠진 나를 지량은 그냥 그렇게 빠져있도록 내버려둔다. 그 상태가 평생의 상태가 아니니까, 빠져있다가 다시 또 다른 것으로 빠지는 순간이 온다는 것을 아니까. 지량이 하는 말들이 그런 말이었다. 극복해야 할 무언가가 아니라는 것.
신기하게도 내가 어제인지 그제인지... '연약한'이라는 말에 대해서 또 곰곰이 생각하며, 하고 싶은 말이 조금씩 튀어나올 것 같았는데, 오늘 공명한 이 내용들과 닿아 드디어 이어졌다. 아마 울고 있는 나를 위로해 주고자 지량이 한 말이었던 것 같은데…. 나는 원래 강한 사람이라고. 그랬어. 그 말을 들으며 나는 내 이름을 떠올렸다. 내 이름은 세라야. 강해지라고 아빠가 그렇게 지었대. 세지라고. 세라. 그래서 나는 그래 맞어 나 원래 강한 사람인데 내가 왜 그러지- 하는 생각에 잠시 빠졌다가, 바로 내가 평생 잊지 못하는 친구의 말 하나를 또 떠올렸다. 내가 너무 유리 심장이라 망할 것 같다고 했던 말. 나는 그 말이 평생 원망스러웠고, 내가 연약하고 내가 소심하다고 느껴질 때 종종 그 말을 떠올리곤 했다. 그건 나를 다시금 강하게 움직이게 하는 어떤 원동력이 되기도 했지만, 때로 나 자신을 자책하는 말로 맴돌기도 했다.
그걸 나는 또 하루 종일 생각했다. 근데, 연약한 것은 꼭 죽나? 연약한 것은 꼭 망할까? 아니야. 연약한 것도 산다. 연약한 것도 다 해낼 수 있어. 연약한 것도 연약한 방식으로 살어. 연약한 것이 누군가를 구할 수도 있고, 사랑할 수도 있어. 그래서 나는 늘 연약한 것들을 위해 소리치는 사람이 되고 싶기도 했고, 그렇게 소리치는 생명들을 사랑하기도 했고 말이다. 장루이 선생님이 내 작업을 보며 'précaire'라는 단어를 알려주셨다. 그건 '연약한'이라는 뜻의 불어 단어다. 내 사진들에서 연약함을 보셨다. 그게 장면들이 녹아내리고 뭉쳐져서 그런 연약하고도 여리여리한 색감과 이미지를 만들어내고 있기도 했지만, 실제로 그것들을 통해 나는 모든 것들을 그렇게 연약하게 바라보고 싶기도 했고. 아무튼, 그 말을 듣고 나는 또 내 사진이 아니라 연약한 나 자신이 떠올라 눈물을 흘려버렸는데, 장루이쌤이 정말 당황해하셨다. 장루이쌤은 내 사진 속에서 연약함을 보시는 거지, 내가 연약한 것이 아니라고 말씀해주셨고, 또 연약하다는 뜻의 그 단어가 나쁜 것이 아니라고 거듭 말씀해주셨다. 나는 그게 무슨 말인지 아는데 그냥 눈물이 났다. 너무 웃겨. 그 날의 단어가 오늘 드디어 이어진다. 나의 이야기로. 오늘 나의 발견으로.
연약한 것은 연약해서 망하거나 죽는 게 아니야. 모든 것이 죽듯이 죽고, 모든 것이 살듯이 살어. 연약한 것은 연약하게 살면 돼. 강한 것은 강하게 살면 되고 말이야. 너무 웃기게도 나는 바로 또 포켓몬들을 떠올린다. 아아- 그래서 내가 포켓몬고를 하게 된 것인가 봐. 진짜 진짜 보기에도 강하고, 실제 능력치도 강력한 포켓몬들이 있는가 하면, 정말 이런 애가 어떻게 살아가지-싶을 정도로 연약하고 아무와도 싸우지 못할 것처럼 생긴 포켓몬들이 있다. 꼬지모같은 애들. 나뭇가지가 웃고 있는데 아무도 해치지 못할 것처럼 생겼어. 너무 하찮아서 귀여운 아이. 그런 애들이 많다. 하지만 모두가 각자의 특성으로 각자의 방식으로 살고 싸운다. 게을킹은 게으름으로 싸우고, 질뻐기는 오물을 던지면서 싸운다. 그러고 보니까 정말 웃기네. 포켓몬고를 내가 갑자기 시작하게 된데도 이유가 있었나 봐. 너무 웃겨. 불현듯 시작하여, 힘이 쭉 빠진 기간 동안 급격히 많이 했는데, 그 각자의 능력치와 특성들을 보는 게 요즘 나의 재미였거든. 하여간... 참 이런 내가 웃겨.
천혜향 두 개를 와라라 먹고 시작한 일기를 쓰다가 하나를 더 먹었어. 천혜향 세 개로 쓴 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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