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혜향 두 개를 와라라 먹었다. 너무너무 상큼하고 너무너무 맛있어. 달콤해. 참으로 만족스러워. 일기를 쓰려고 했는데, 마침 천혜향을 먹고 너무 만족스러워 이 문장으로 일기를 시작한다.
쓰고 싶은 말들이 가끔씩 한마디씩 혹은 한 단어씩 혹은 한 이미지씩 있었다. 조각인지 뭉텅이인지 모으기가 힘들어서 한동안 아무것도 쓰지는 못하였다. 오늘은 그나마 손가락을 움직일 수가 있어서 써보기로 한다. 하지만 이 문장을 쓰자고 바로 또 한 이십 분 동안 다른 곳을 배회하다가 돌아왔다.
오늘 무언가를 쓰고 싶다는 생각과 사진을 펼쳐 보이고 싶다는 마음이 들었는데…. 무언가를 쓰고 싶다는 마음을 불러일으킨 것은 '극복'이라는 단어 때문이었다. 장애와 관련한 교육 영상을 볼 일이 있었는데, 장애를 무의식적으로 부정적인 단어와 연결 지어 표현하는 것을 지양할 수 있도록 적절치 못한 표현을 짚어주고 있었다. 흔히들 쓰는…. 표현 "'장애를 극복하고' ---을 해낸다."와 같은 말을 예시로 설명하고 있었다. 사실 익히 알고 있는 내용이었지만, 갑자기 그 설명에 깊이 공명했다. 장애는 질병과 같이 고쳐져야 하는 어떤 상태가 아니라 고착된 한 특성이므로, '극복한다'라는 표현과 함께 쓸 수 없는 말이었다.
그 설명을 들으며 나는 내가 주기적으로 겪는 어떤 상태를 떠올렸다. 나는 활기차고 밝고 명랑하게 지내다가도, 어떤 기간에는 느리고 어둡고, 힘이 없어진다. 내가 이제껏 '정상적인', '원래의' 나의 상태로 지내다가 아주 어쩌다가 내가 힘들고 지치게 되면, 우울의 시기가 찾아온다고 표현하곤 했는데, 그래서 나에게 찾아오는 그 우울의 상태는 항상 너무나 힘들고, 나뿐만 아니라 모두를 힘들게 하고 반드시 극복해야만 하는 어떤 상태였고, 그것은 나의 질병이었다. 때문에 그 시기의 나는 나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리고 내가 요즘 가장 두렵고도 괴롭고 싫은 것은 내가 오늘 나의 우울을 치료한다고 하더라도, 다시 언젠가 또 지친 몸에 우울이 찾아올 수도 있다는 사실이었다. 지금껏 살아온 날들이 너무 힘들었기에, 그 괴로운 시기를 몇 번 겪고 나니까 그것들을 다시는 경험하고 싶지 않은 것이다. 다시 치료가 필요해지는 상태를 말이다. 이상하게 이번에 치료를 진행하는 중에 갑자기 내가 많이 힘들어졌다. 3월 한 달 동안에. 급격히 약간 힘겨워진 것 같다. 어찌저찌 약간 지친 나를 가누어보려고 했는데, 3월은 그러다가 금세 지나간 것 같다. 3월의 모든 꿈도 그러하고. 아무튼, 이 상태는 나에게 극복되어야 할 상태였다. 이때의 나는 내가 아니고, 이 상태의 내가 하는 생각과 말은 크게 중요하거나 어떤 효력이 있지도 않다고 생각했고 말이다.
그치만 우울의 상태가 찾아오는 시기를 예측하거나 대비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그것이 어떤 뚜렷한 형태와 규칙을 갖는 것도 아니긴 하지만, 평생 내가 그것을 몇 번이고 마주해왔다면, 평생 몇 번이고 마주할 수 있는 질병이라면, 그것이 질병이라 할지라도 어쩌면 그것은 내가 가진 어떤 한 특성일 수 있지 않을까. 그것이 나를 이루는 어떤 특성이지 않을까. 힘이 쭉 빠져서 슬프고, 무감하고, 바보 같고, 불안한 내가 사는 그 시기도 온전한 나를 이루는 한 부분이지 않을까. 그럼 내가 언제든 찾아올 수 있는 이 나의 상태를 극복해야 하는 상태가 아니라, 내가 가진 하나의 특성으로 받아들이고 그 특성에 맞게 나를 잘 다루어가며 살아가야 하는 것이 아닐까.
바로 지난 일기에만 해도 내가 '극복'이라는 단어를 썼더라. 근데 무언가를 언제나 극복해야만 하는 건 아닌가 봐. 내가 겪는 폭력적이고 비관적인 사고와 감정의 상태도 나의 한 부분일 뿐이었다. 고치고 뜯어내어 없는 것으로 만들 것은 아니었다. 나는 수많은 모습의 나로 이루어져 있고, 그 중에 나를 살리고 싶은 나와 나를 죽이고 싶은 나도 있을 뿐이다. 그 각각의 파동들이 나에게 다가올 때 나는 그들에 맞는 움직임으로 살면 되는 것이야. 힘이 없을 때는 힘없이 지내다 보면 다시 힘이 나는 시기가 오겠지. 그걸 도와주는 약이 있을 수도 있고, 선생님이 있을 수도 있고, 친구가 있을 수도 있고... 이렇게 생각하니 또 우울이 찾아오면 어쩌지-하는 두려움은 이제 가벼워졌다. 극복해야 할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니 가벼워지네. 요즘 포켓몬고에 빠진 나를 지량은 그냥 그렇게 빠져있도록 내버려둔다. 그 상태가 평생의 상태가 아니니까, 빠져있다가 다시 또 다른 것으로 빠지는 순간이 온다는 것을 아니까. 지량이 하는 말들이 그런 말이었다. 극복해야 할 무언가가 아니라는 것.
신기하게도 내가 어제인지 그제인지... '연약한'이라는 말에 대해서 또 곰곰이 생각하며, 하고 싶은 말이 조금씩 튀어나올 것 같았는데, 오늘 공명한 이 내용들과 닿아 드디어 이어졌다. 아마 울고 있는 나를 위로해 주고자 지량이 한 말이었던 것 같은데…. 나는 원래 강한 사람이라고. 그랬어. 그 말을 들으며 나는 내 이름을 떠올렸다. 내 이름은 세라야. 강해지라고 아빠가 그렇게 지었대. 세지라고. 세라. 그래서 나는 그래 맞어 나 원래 강한 사람인데 내가 왜 그러지- 하는 생각에 잠시 빠졌다가, 바로 내가 평생 잊지 못하는 친구의 말 하나를 또 떠올렸다. 내가 너무 유리 심장이라 망할 것 같다고 했던 말. 나는 그 말이 평생 원망스러웠고, 내가 연약하고 내가 소심하다고 느껴질 때 종종 그 말을 떠올리곤 했다. 그건 나를 다시금 강하게 움직이게 하는 어떤 원동력이 되기도 했지만, 때로 나 자신을 자책하는 말로 맴돌기도 했다.
그걸 나는 또 하루 종일 생각했다. 근데, 연약한 것은 꼭 죽나? 연약한 것은 꼭 망할까? 아니야. 연약한 것도 산다. 연약한 것도 다 해낼 수 있어. 연약한 것도 연약한 방식으로 살어. 연약한 것이 누군가를 구할 수도 있고, 사랑할 수도 있어. 그래서 나는 늘 연약한 것들을 위해 소리치는 사람이 되고 싶기도 했고, 그렇게 소리치는 생명들을 사랑하기도 했고 말이다. 장루이 선생님이 내 작업을 보며 'précaire'라는 단어를 알려주셨다. 그건 '연약한'이라는 뜻의 불어 단어다. 내 사진들에서 연약함을 보셨다. 그게 장면들이 녹아내리고 뭉쳐져서 그런 연약하고도 여리여리한 색감과 이미지를 만들어내고 있기도 했지만, 실제로 그것들을 통해 나는 모든 것들을 그렇게 연약하게 바라보고 싶기도 했고. 아무튼, 그 말을 듣고 나는 또 내 사진이 아니라 연약한 나 자신이 떠올라 눈물을 흘려버렸는데, 장루이쌤이 정말 당황해하셨다. 장루이쌤은 내 사진 속에서 연약함을 보시는 거지, 내가 연약한 것이 아니라고 말씀해주셨고, 또 연약하다는 뜻의 그 단어가 나쁜 것이 아니라고 거듭 말씀해주셨다. 나는 그게 무슨 말인지 아는데 그냥 눈물이 났다. 너무 웃겨. 그 날의 단어가 오늘 드디어 이어진다. 나의 이야기로. 오늘 나의 발견으로.
연약한 것은 연약해서 망하거나 죽는 게 아니야. 모든 것이 죽듯이 죽고, 모든 것이 살듯이 살어. 연약한 것은 연약하게 살면 돼. 강한 것은 강하게 살면 되고 말이야. 너무 웃기게도 나는 바로 또 포켓몬들을 떠올린다. 아아- 그래서 내가 포켓몬고를 하게 된 것인가 봐. 진짜 진짜 보기에도 강하고, 실제 능력치도 강력한 포켓몬들이 있는가 하면, 정말 이런 애가 어떻게 살아가지-싶을 정도로 연약하고 아무와도 싸우지 못할 것처럼 생긴 포켓몬들이 있다. 꼬지모같은 애들. 나뭇가지가 웃고 있는데 아무도 해치지 못할 것처럼 생겼어. 너무 하찮아서 귀여운 아이. 그런 애들이 많다. 하지만 모두가 각자의 특성으로 각자의 방식으로 살고 싸운다. 게을킹은 게으름으로 싸우고, 질뻐기는 오물을 던지면서 싸운다. 그러고 보니까 정말 웃기네. 포켓몬고를 내가 갑자기 시작하게 된데도 이유가 있었나 봐. 너무 웃겨. 불현듯 시작하여, 힘이 쭉 빠진 기간 동안 급격히 많이 했는데, 그 각자의 능력치와 특성들을 보는 게 요즘 나의 재미였거든. 하여간... 참 이런 내가 웃겨.
천혜향 두 개를 와라라 먹고 시작한 일기를 쓰다가 하나를 더 먹었어. 천혜향 세 개로 쓴 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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