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요일, 11월 26, 2019

얼지마 죽지마 부활할거야

어떤 말을 내뱉어도 무섭다.
내가 악하다는 말도, 그렇기에 이 생이 이렇게 괴롭다는 말도.
그래, 그것이 전부 다 사실일지라도, 내 입으로, 내 손으로 내뱉으면은, 정말로 사실이 될까봐 두려운 것이다. 그래서 글을 썼다가도 지운다. 그래서 기도를 해야하는 것이다. 조금이라도, 나약하고 악한 이 존재의 본질을 이해받기 위해서, 동정받기 위해서.
죽고싶다는 말은 한번 내뱉어지고 나면, 습관처럼 우리 마음 속에 뿌리를 내린다. 처음 그 말을 내뱉은 순간 이후에는, 무의식적으로 내 입에서 나오기 시작한다. 마음 속으로 되내인다. 그러나 사실 진정으로 내가 원한 것은 그것이 아니었다. 나는 실은 죽고싶은 것이 아니라, 나는 단지 잘 살고 싶을 뿐이었다. 잘 살고싶다. 잘 살고싶다. 잘 살고싶다. 이 말이, 돌연, '죽고싶다'가 된다. 잘 살아지는 것이 그렇게 어려운 일인지 몰랐으니까는.
언제나 나에게 사랑이 가득할거라고 생각했다. 우리는 모두 선하고, 연약하고, 그러나 희망이 가득하다고. 그러나 인간의 본질은 악 (아무 것도 없는 자연의 상태. 무의 상태) 이라는 것을 깨닫고 난 이후에, 나는 우리가, 아니, 내가 인간으로서 가진 이 원죄를 영원히 벗을 수 없을 것이란 생각을 했나보다. 나의 생이 괴롭고, 고단할 때는 생각이 그렇게 이어졌다. 나의 괴로움이 타당한 쪽으로. 그러니 나의 악함이 구제받기 위해서는 육체적으로, 혹은 정신적으로 괴로울 수밖에 없다는 그런 생각. 그리하여 수행하는 자들이 고통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고통을 짊어지고 가는 것이라는 생각. 그러다가 이 생각들이 비대해지는 것이다. 나는 지금 고통스럽고, 그러나 그 고통에서 빠져나올 수 없을 것이라는 생각. 생의 의미가 사라져버리는 것이다. 분명 해낼 수 있음에도, 몸을 움직이기가 점점 힘들어지는 것, 소용이 없을 것이라는 생각에. 그 굴레 속에서, 나는 나 자신을 미워할 수밖에 없다. 계속해서.
이 생각의 굴레는 너무 무섭고 지독해. 어릴 적에는 아직 오지 않은 날 속의 내 모습을 그려볼 수 있었는데, 요즘은 나의 모습이 통 보이질 않는다. 삶이 그렇게 사라지는 것일까. 정말로 정말로 나는 스러져가고 있던 것일까.
그러나 여전히 나는 세상에 분노한다. 분노의 에너지는 생의 에너지가 아닐까하고 생각을 해본다. 피하는 것인지, 숨는 것인지, 혹은 나에게 집중하는 것인지 알 수 없는 내 모습을 보았다. 모두 맞겠지. 그러다가 맞이하는 비보들. 더이상은 할 말이 없다. 우리는 완전히 틀려버렸다. 멜랑꼴리아. 우리에게 다가오고 있는 행성. 우리는 그렇게 결국에 다 죽어버리고 말 것이다. 죽은 이들은 평안을 얻을 것이다. 나는 정말로 그렇게 믿는다. 평화롭고, 편안한 잠에 들었을 영혼들을 위해 기도한다. 그러나 슬픈 이유는? 이제 평안을 얻으러 갔는데도, 우리가 슬픈 이유는 무엇일까 생각을 한다. 그래. 생이 평안할 수는 없을까? 평안을 찾으러 죽음을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내가 서있는 이 자리, 이 곳이 내게 평안을 주는 곳일 수는 없을까. 죽고싶다는 생각이 아니라, 살고싶다는 생각이 드는 세상을 만들지 못한 것에, 우리는 모두 깊은 반성과 후회를 해야만 한다. 평안은 여기에 있어야 한다. 바로 이 곳에.
멜랑꼴리아를 그리고 있던 나는, 그 작업을 통해, 어쩌면 우리들 모두의 회복을 꿈꾸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렇다. 나는 어쩌면 그 회복을 준비하는 것이다. 사실 우리는 그렇게 약하지도 않다. 다만 우리의 감각이 많이 열려있고, 예민하여, 이 세상에서 받아들이는 것이 큰 것이겠지. 커다랗게 다가오는 고통, 커다랗게 다가오는 슬픔, 커다랗게 다가오는 기쁨. 이것이 우리의 축복이라고 생각하던 때도 있었다. 이제는 어쩌면 저주라고 생각했다. 그것이 우리의 굴레다.
모든 것을 축복이라 여길 일도 없으며, 저주라고 여길 일도 없음을. 모든 것은 양극단의 가치로 나뉘어져서 내 양팔을 붙잡고 각자의 자리에서 잡아당긴다. 결국에는 몸이 찢기어질 수밖에 없는 그런 굴레. 굴레. 굴레. 그것을 벗고 싶다.
기도를 하자. 우리를 존재하게 한 모든 것들에게. 우리를 불쌍히 여겨주시옵소서. 어여삐 여기옵소서. 평안이 있으라. 불쌍히 여겨주시옵소서. 어여삐 여기소서..
죽고싶다는 말이 나오는 내 마음의 이면에서 할 말을 또 찾아냈다. 얼지마 죽지마 부활할거야. 나도 모르게 끄집어낸 이 러시아 영화 제목. 얼지마 죽지마 부활할거야. 이 문장에 큰 오역이 있던 것으로 기억하고 있었는데, 다시 찾으려하니 나오질 않는다. 그래서 그냥 나는 영원히 얼지마 죽지마 부활할거야.를 기억하기로 했다. 얼지마 죽지마 부활할거야. 그 말을 외치기 위하여 나는 어둠에서 나오기로 했다. 아니 그래야만 한다.
얼지마 죽지마 부활할거야.

토요일, 11월 16, 2019

모두에게

16

16일이 되었다. 그렇게 11월 한달의 중심을 지나간다. 정신없이 지나간 어제까지의 하루들. 
매일 매일 일기를 써보려고 했으나 그것도 쉽지 않다. 사실 매일 밤 잠들기 전에 글쓰기 창을 열어놓고 써내려가지만 곧 잠이 들어 거의 잠꼬대를 하듯이 글씨를 썼던 것 같다. 잠꼬대를 그대로 써버린 말, 혹은 꿈을 기억하기 위하여 나도 모르게 써내려간 표현들. 다음날이 되면 흰 바탕 위에 쓰여진 말도 안되는 말들을 보고는 그냥 닫아버렸지. 왜 이렇게 잠이 오는걸까. 이 질문도 백번은 이미 했다. 그러나 그것이 얼마나 큰 축복인지에 대한 글도 발견했다. 
이상한 데이터들. 
온갖 기억이 섞여버리고. .. 
아 아 추운 내 방
졸린 내 방 

목요일, 11월 14, 2019

기적

기적이 일어났다.
정말 믿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났다.
정말 오랜만에 경험하는 놀라움과 슬픔과 기쁨이었다.
전말은 이렇다.

나디르가 오늘 저녁에 바나나와 사과를 정말 잔뜩 주워왔다. 이걸 가지고 무얼만들까 하다가 우리는 크럼블을 만들고, 잼을 만들기로 했다. 잼을 보관하기 위해 유리병 두개를 준비해놓았다. 열심히 잼을 만들고 보니, 병이 하나 모자라서 우리는 여기저기 구석을 둘러보던 참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나디르가 냉장고 위를 보더니 놀라 즐거워하는 것이었다. 나는 커다란 병을 찾았구나하고 생각했다. 나디르는 내게 빨리 저기 보라며 웃고 있었지만 내가 키가 작아서 그런지 나는 아무리 봐도 아무 것도 보이지가 않았다. 그래서 나디르가 나를 들어줬다. 순간 내 눈 앞에 보인 것은...
6월에 사라졌던 달팽이었다.. 정말 나는 아무 말이 나오질 않았다. 냉장고 위에 있는 벽 모서리에 달팽이가 붙어있던 것이다. 한번도 그곳은 쳐다보지도 않았던 것 같다. 달팽이를 찾는답시고 매일 여기저기 서랍장 아래 어두컴컴한 곳은 살펴보았지만 말이다...
나는 정말 당연히 죽었다고 생각했다. 수개월이 지났고, 달팽이가 물도 없고, 먹을 것도 없었을텐데 분명 말라죽었을거라고 생각하고 이따금씩 그 말라죽었을 달팽이의 몸을 생각하며 슬퍼했다. 나디르가 달팽이를 벽에서 떼어냈다.
죽었을거야. 라고 나는 말했다.
나디르는 달팽이를 떼어내 들여다보았다. 나는 너무나 슬퍼져서, 거기에서 죽었을 달팽이에게 너무 미안해서 말없이 놀란 가슴만 부여잡고 있을 뿐이었다. 그러나 나디르는 몸이 보이지 않는다며, 안 속에 들어가있는 것 같다고 했다. 그래서 물을 얕게 받아놓고 싱크대에 달팽이 몸이 계속 물에 닿도록 해주었다.
달팽이 몸이 조금 나왔다.
나는 그때까지도 믿을 수가 없었다. 그런데 정말 달팽이는 아주 조금씩 나오고 있었다. 나는 정말 숨을 죽이고 그 모습을 바라보았고, 너무나 큰 감동에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당연히 죽었을거라고 생각했던 달팽이가 살아있었다니. 먹을게 무어가 있었을까. 달팽이는 6월에 없어졌는데, 지금은 11월이란 말이다. 참 믿을 수 없는 광경이었다.
오만가지 생각이 지나가는 중에 나는 달팽이를 통해 내 생을 다시 들여다보았다. 이렇게 작고 약해보이는 것도 이렇게 살 수 있구나. 나는 너가 죽었을 거라고 단언했건만 이렇게 살아있었구나. 나는 왜 그렇게 그의 죽음을 확신했지. 사라졌을 때, 그를 응원하지도 않았고, 그저 죽음의 길로 갔다고만 여겼던 것이 참 바보같고, 나빴다는 생각을 했다. 그건 내가 나에 대해 생각하는 것과 꼭 마찬가지인 것 같았다. 그래서 참 내가 놀랐던 것이다. 가슴이 철렁했다. 나는 내 자신이 생을 살아낼 수 없다고 은연 중에 생각하는거야. 저 달팽이처럼, 아무 것도 없는 곳에 ,먹을 것도, 마실 것도, 나를 구해줄 이도 없는 그런 곳에 혼자 내팽겨 쳐져 있다고..
그러나 너는 살아있었다. 먹은게 없으니 몸도 자라지 않았고, 집은 튼튼해보이지 않았고, 활발한 성격도 약간 바뀐 것 같았지만. 살아있었다. 잠을 자고 있었다. 계속 그를 쳐다보는 것이 신기하고 안쓰럽고 귀엽고. 정말 기적같다는 말이 나왔다. 그러나 어쩌면 그에겐 당연한 생의 법칙이었을 것이다. 달팽이에 대해서 알아보니, 물과 음식이 없이도 수개월을 살 수 있다고 했다. 상황이 여의치 않으면 동면에 들어가기도 하고 말이다.
그치만 나는 너무나 놀라 계속해서 이건 기적이야 하고 계속 생각했다. 그렇다면 기적은 생의 법칙이구나. 어쩌면 너무나 당연했던 사실이었을 수도. 달팽이를 바라보는 내게 나디르가 그랬다.
“봐. 그는 그렇게 약하지 않아.”
정말로. 약하지 않았다. 너무 강한 아이였다. 기특해. 나는 너무 놀라버렸어. 너무 행복해. 너무 고마워. 그 작은 달팽이를 보고 나는, 나도 살 수 있겠구나하고 생각해버렸다. 우리 살 수 있는 세상이구나. 하고...

수요일, 11월 13, 2019

꾸졌어

기분이 너무 꾸졌다.
쓸모없고 초라해.
허무해.
허무 허무 허무 허무 허무 허무 허무 허무 허무 허무 허무 허무 허무 허무 허무 허무
허무 허무 허무 허무 허무 허무 허무 허무 허무 허무 허무 허무 허무 허무 허무허무허무허ㅜ무
허무허뭐허무 허무 허무 허무 허무 허무 허무 허무 ㅎ머ㅜㅎ 허무 허무 허무 허무 허무
허무
허무가 나를 누른다.
죄책감과 허무와 신경질의 삼중주 -
거지같은 삶으로 난 안 돌아가
이거 누구 노래야
아님 말구
그래 마음껏 비웃어라
유치뽕짝이라고 내 마음

모든 것으로부터 튕겨져나왔다.
삶은 허무하고 거지같고
그러나 실로 외치는 말은 죽고싶다.가 아니라
살고싶다. 라는 말
나는 혼자서 말한다
살고싶다
살고싶다
살고싶다
이렇게.
졸리기 싫어
배고프기 싫어
배부르기 싫어
모두 다 싫어
인간적인 것이라면 모두 다 싫어
인간다운 삶을 누리고 있자면 너무도 즉각적으로 순수 인간이 되어버리는 나의 모습에 경멸을 느낀다.
뜨뜨한 이불
부른 배
잠이 솔-솔 오는 자리
엄청 좋은 노래가 나와
왜 사니


월요일, 11월 11, 2019

하루에도 몇번이고

이리저리 흩어지고 찢기는 마음. 지리멸렬이라는 단어를 쓰려다가 말았다. 말조차도 풀어헤치고 싶어서. 순수한 글자들로, 더이상 다른 의미를 함축하지 않는 그 자체로의 말들을 쓰기로 했다. 여러가지 글자를 내포하고 있는 말들을 피하기로 한 것이다. 나의 작은 모든 감정들까지도 하나로 뭉쳐질 것만 같으니까. 
몇번의 뜀박질이 있었다. 하루를 이틀로 사는 날이었다. 그러나 하루동안 해야할 일조차도 제대로 하지 못했던 그런 날이었다. 눈은 내내 뜨고 있었지만 말이다. 
그러나 이내 곧, 아니 이내 곧이 아니라, 해가 지고, 모든 것이 마무리되어갈 때 즈음에 나는 겨우 다시 결심을 하는 것이다. 내 정신을 맑게 하기 위하여, 나를 흐릿하게 만드는 모든 것들은 피하기로 했다. 나를 의지하게 만드는 모든 것들로부터 멀어지는 것이다. 사람은 제외하겠다. 사람은 다른 사람이 있어야 사람처럼 살 수 있으니까. 
겨우 달랜 마음 어화둥둥 안고나니, 시간은 이미 훌쩍 지나있었고, 나는 이제 잠이 미친듯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무엇도 하지 않은 하루. 물론 무엇인가는 했으나 말이다.
옛날 옛적의 사진들과 말들을 주워담았다. 하루종일 사실 그 일을 했다. 노래도. 손톱에는 다시 한번 봉숭아물을 진하게 들였다. 

수요일, 11월 06, 2019

채널이 끝났다.
무엇때문인지 모르겠지만 때마침 나의 몸 또한 한차례 풀이 꺾였다.
불과 어제까지만 해도 며칠간 에너지가 넘치고 나는 많이 움직일 수 있었는데 말이다.
잠도 늦게잤다. 그러나 오늘은 저녁 열시부터 잠이 왔다. 아무래도 너무 졸려서 글을 쓸 수가 없을 것 같지만 그래도 매일 매일 무어라도 쓰기로 마음을 먹었으니, 아무말을 남긴다. 
채널이 열린 기간동안에 내가 기도를 했다는 것, 그것이 끝나자 내가 너무나 졸리고 힘들어졌다는 것.. 교회에서 왼쪽에 서있던 사람들ㅇ 갑자기 찬양단처럼 노래를 불렀다. 너무나 감동적이게...

일요일, 11월 03, 2019

一始無始一 

일시무시일 
일종무종일

모두가 같은 말을 하고 있었다 
마방진과 단테 가브리엘 로세티의 시, 부처님. 
1을 잊지않기로 했다. 모든 것은 1이 모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