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요일, 10월 27, 2019

가만히 앉아 사물들을 들여다보면 보이는 것들

바람 한 점 없는 길에 높다란 나무에서 나뭇잎 하나가 떨어졌다. 
그게 무슨 영문인지 난 이제 알았어.
괜시리 찡하고 귀여운거. 
누군가 밟고간 가지에서 떨어지는 나뭇잎이었다. 
나무 뒤에선 사람들이 공을 주고받고 있었다. 모두 가족이 있었다. 강아지도 엄청 많고.
나만 혼자 벤치에 다리를 쭉 뻗고 앉아 손바닥만한 공책에 글씨를 대충 갈겨 썼다. 
지나가던 강아지가 내 앞에 와서 아는 척을 하고, 할아버지는 내 공책에 갈겨진 글씨를 뚫어지게 쳐다보며 지나갔다. 
가만히 앉아 눈앞의 풍경을 들여다보고 있으니, 내가 회복할 수 없는 것들이 보였다.
이미 망쳐버린 사랑들
이미 망쳐버린 가족
이미 망쳐버린 삶
내가 이미 망쳐버린 것들이 눈 앞에 다른 사람들에게는 너무나 아무렇지 않은 사실들로 놓여있을 때에 나는 생각한 것이다. 
아 아 . 내가 회복해낼 수 없는 것들이구나. 
그건 내게 절망을 불러일으킨다. 
그리고 이미 떠나버린 사람을 생각한다. 
문득 문득 떠오르는 얼굴과 이름 
죽은 사람 얼굴을 떠올려도 그 얼굴은 살아있을 적의 얼굴이다. 
죽은 사람은 떠올릴 수가 없네. 
사진을 보다가 참 이상하다는 생각을 했다. 
그 얼굴에는 죽음이 없으니까. 

어떤날

어떤날의 노래를 듣다가 울었다. 11월 그 저녁에. 내가 무의식적으로 한없이 슬픈 음정으로 노래를 끌어가려 할 때에, 노래는 다시 내게서 음정을 빼앗아 너무도 아름다운 선율을 들려준다. 내가 스러지지 않게. 
그렇게 만든 노래인 것 같다. 
그렇게 나는 7분동안 스러졌다가 다시 정신을 차렸다가를 반복했다.
떠나간 친구의 노래를 말하는 부분에서, 나는 너무 슬프고 놀란 나머지 울어버렸다. 계속 다시 그 부분으로 돌아갔다. 떠나가지말라고 외치지만은 모두 이미 떠나갔고, 때로 나는 자신이 없다. 나 자신에 대해서도. 




떠나간 친구의 노래가 들려온다
산다는 것이 뭐냐하던
사랑이 모든 것이냐던
누가 내게 대답해주냐던




목요일, 10월 24, 2019

해가 나왔다

드디어 햇살이. 얼마나 기다렸는지 아니? 며칠간 숨이 막혔다. 무거운 먹구름에 내 몸이 눌리었다. 겨우 몸을 일으켰고 해야할 일들을 했다. 온 몸에 멍이 든 것 같이 아팠다. 아무 것도 해낼 수 없을 것 같았고, 우리는 알았지. 우리는 아직 괜찮지 않아. 우리는 더 나아져야 해. 사랑을 되찾기로 했지만 닷새만에 그런 다짐은 사라지고 만다. 모두가 각자의 불행을 그리워하는 것 같았다. 참으로 알량한 셈법이 세상을 이룬다. 어제의 말은 오늘 나를 배신한다. 진정으로 행복하기 위해서는 보리수 아래로 달려가야 하지만 나는 여기에 있다. 우리 생은 여기에 있다. 우리는 여기에. 우리 몸의 구멍들이 점점 막혀버리고 있었다. 나는 여전히 숨을 얕게 쉬고 있다. 
그리고 오늘. 이상하게도 해가 나오니 목구멍 아래가 울렁거리면서 눈물이 나올 것만 같다. 그래 나는 울 준비가 되어있다. 다시. 다시. 다시. 우리의 목숨은 서로에게 모두 연결되어 있잖아. 그러니 아프게 하지마. 나도 더이상 모두를 위한 사랑은 힘들어. 갑자기 우리 생이 너무 짧게 느껴져. 그러나, 봐. 찰나는 겁이고 겁은 찰나고. 이 순간은 겁만큼이나 영원해보이지만 생은 너무나 짧잖아. 그러니 우리가 할 수 있는게 무어겠어. 우리가 사랑이라 부르는 것도, 우리가 증오하는 것도 결국에는 전부 하나야. 없는 것은 없으니까. 우리 사이에는 공간이 없어. 그러니 나는 내가 불안한만큼 사진을 찍고 있을게. 너도 이걸 알아줘.

화요일, 10월 22, 2019

견뎌내는 것

거듭
나의 울화를 다스리려 노력한다.
나의 애타는 노력에도 불구하고, 나는 때때로 통제력을 잃는다.
나를 버리려는 의지. 그것이 매달린 줄이 팽팽-해졌다가 팅. 하고 끊어지는 찰나.
찰나.
찰나.
나를 버리겠다는 것은 나에 대한 포기가 아니라, 나에 대한 무한한 의지였지.
더이상의 견뎌내는 일을 멈추는 것. 견뎌내는 것.

정신적 조직체

깨달음을 얻기 위해서는 평화로운 보리수 아래로 가야한다. 평화로운 보리수 아래로.
내 실존의 실재적 고통으로부터 벗어나, 무엇도 나의 집중을 방해할 수 없는 곳으로 가야한다. 내 머리위로 떨어지는 화약도 없어야하고, 나를 칼로 찔러 죽이는 악마도, 나를 흔들어깨우는 사랑도 없어야한다.

미친놈을 만나고 나니 이런 생각이 들더라. 어제 보았던 모든 것은 무라는 가르침이 참 오만하다는 생각. 참으로 여유롭다는 생각. 그래 이것이 바로 인간의 한계라고 말할지도 모르지만, 도망갈 곳 없는 사람에게, 혹은 목숨에 위협을 느끼는 사람에게 꺠달음이란 것은 어쩌면 너무나 사치스러운 일일지도 모른다.. 내가 혼자 세상의 모든 것이 무라는 것을 깨달으면 무슨 소용이야. 나의 목숨은 짓눌리고, 짓밟힐 것이다. 그러는 동안에. 우리는 죽임을 당한다.
생존과 수행의 상관관계를 파악하라.
목숨이 있은 후에, 깨달음이 온다.


인간의 운명은 그래, 깃털처럼 가볍고, 우주의 시간 앞에서 1찰나도 되지 않는 그런 보잘 것 없는 것인 걸 알아.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내가 받는 고통 또한 깃털처럼, 찰나처럼 받아들일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것마저 우리가 감내하고, 받아들여야한다면, 그것은 우리 자신에 대한 또 다른 학대가 될 것이다. 학대받고, 학대받고, 학대받고. 내가 없어야한다면. 내가 받는 고통은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내가 없는데, 나의 고통은 있을 수 있는가. 이 몸뚱이가 찢기었다. 이 몸뚱이가 버려졌다. 이 몸뚱이는 무엇인가? 무엇으로 설명할 것인가? 그것이 '나'가 아니라고 하면, 도대체 몸뚱이는 어디로 가야하는가. 누가 돌보아줄 것인가. 내 몸뚱이와 내게 느껴지는 고통을 분리할 수는 없다.

도대체 그 정신적 조직체라는 것은 어떻게 이동하는가. 불현듯 가장의 근심이 떠오른다. 그게 바로 어쩌면 오드라덱일까. 소멸하지 않는, 이상한 실꾸러미. 어떠한 행위도 가지지 않는. 그러나 그것은 시간을 통과한다.

내가 풀지 못한 의문은 일단 통과한다. 다시. 고통. 고통은 분리되지 않는다. 그 무엇으로부터도. 내가 다른 믿음을 가지기 전까지는. 모든 것은 믿음에 달렸는가. 그렇다.

화요일, 10월 15, 2019

..

애도는 너무나 쉽다. 작별인사를 하는 것은 너무나 빠르다. 너무도 쉬이 누군가를 떠나보낸 날. 누군가를 진정으로 받아들이는 일은 왜 평생이 걸리는 걸까. 그러는 동안 누군가의 평생은 지나가버렸다.
어제는 우리가 가진 꿈이 얼마나 연약하고 소중한지 생각했는데, 오늘 떠난 이가 가지고 있었을 꿈을 생각하니 너무 슬퍼진 것이다. 꿈이 사라지고, 다른 모든 것이 남겨져서가 아니라.. 떠나는 사람에게는 더이상 그 꿈 따위는 중요한 것이 아니었으리라는 것이.. 우리는 모두 알잖아. 이 피로한 생 앞에서도 다시 하루를 살아내는 것은 우리가 태초에 가졌던 꿈들을 기억하기 때문이라는 것을. 그러나 때로는 그것조차도 잊게 하는 고통도 있다는 것을. 그리고 그 고통을 끝내는 것말고는 다른 것은 생각할 수 없는 때도 있다는 것을. 그 앞에 선 사람에게 우린 어떤 위로를 해줄 수 있을까.
우리는 살아있기 때문에 모두 연약할 것이다. 그걸 알고 있으면서도 때로는 자기 자신에게 혹은 내가 사랑하는 누군가가 더 이겨낼 수 있기를, 그저 나아갈 수 있기만을 바란 적이 있다. 그래서 미안해 모두에게. 나에게 엄마에게 그리고 먼저 떠난 그에게도. 누구도 그런 큰 고통을 혼자 감내할 수 없는걸.
나의 사랑하는 사람들. 그러니 행여라도 지금 자신이 가졌던 모든 사랑을 잃은 것 같다면,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 때가 온다면, 나에게 모두 말해줬으면.
그리고 또.. 우리의 몸이, 우리의 행동이 타인의 욕망으로부터, 검열로부터 자유로워지기를. 그리고 이 소중한, 자유로운 마음에 상처주는 이들도 사라지기를 기도할거야. 정말 너무 속상해. 오늘 우리의 애도는 이렇게나 쉬웠지만, 우리에게 남겨진 다른 슬픔들을 위해 계속 애도해야 해.

토요일, 10월 05, 2019

2017년 3월 21일

5월까지 내 방은 겨우내의 추위를 가두고 있을 것이다. 책상 앞에 앉아있던 나는 이 지긋지긋한 한기에 걸쳐입을 옷을 찾다가 엄마가 집에 와서 입었던 옷을 발견했다. 우리 집에 오면 항상 그걸 입고 있는데 참 따뜻해보인단 생각을 했다. 머리를 밀어넣고 옷을 입는데 엄마냄새가 난다. 너무 사랑스럽고 따뜻해서 어쩔 줄을 몰랐다. 코를 박고 다시 엄마 냄새를 맡았다.
어제부터 엄마를 생각하는 중이었다. 엄마랑 통화를 했다. 엄마한테 연락이 잘 오지 않을 때는 엄마가 힘들거나 우울해하고 있을 때다. 예상했던 대로 엄마 목소리는 힘이 없었다. 이제 자려고 누웠다는 그는는 별안간… “나한테 전화해주는 사람 우리 세라밖에 없어”라고 말하더니 엉엉 우는 것이었다. 나는 웃으며 왜 우냐고 엄마를 달랬지만 사실은 엄마 울움소리가 너무 너무 가여워 우울해지고 말았다. 가엽다는 이 말이 또 너무 가여워 눈물이 날 것만 같다. 엄마는 외롭다고 했다.
이 외로움은 우리 모두가 타고 난 것인데, 이 너무나도 당연한, 이 벗어날 수 없는 외로움이 엄마의 것이라고 생각할 때는 자꾸만 가여워진다. 나는 그렇게 엄마를 생각하다가 계속 마음이 아픈 것이다. 왜 엄마를 생각하는 것은 아플까. 엄마에게 연민을 느끼는 것이 너무 싫고 미안해서 그 마음을 그만 두기로 했더랬는데... 어제 예상치못하게, 온 얼굴에 따스한 미소를 품고 있는 사람을 마주친 바람에 나는 엄마를 생각하게 되었고, 엄마에게 전활걸어 울음소리를 듣게 된 것이다. 그 울음 소리는 내 모든 냉소를 무력하게 만들었다. 어쩔 때는 내가 엄마를 낳은 것 같다는 느낌이 든다. 나도 참.. 오늘 꿈 속에선 엄마가 사라져서 엄마를 이리저리 찾아 헤맸다. 하천을 거슬러 풀을 헤치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