깨달음을 얻기 위해서는 평화로운 보리수 아래로 가야한다. 평화로운 보리수 아래로.
내 실존의 실재적 고통으로부터 벗어나, 무엇도 나의 집중을 방해할 수 없는 곳으로 가야한다. 내 머리위로 떨어지는 화약도 없어야하고, 나를 칼로 찔러 죽이는 악마도, 나를 흔들어깨우는 사랑도 없어야한다.
미친놈을 만나고 나니 이런 생각이 들더라. 어제 보았던 모든 것은 무라는 가르침이 참 오만하다는 생각. 참으로 여유롭다는 생각. 그래 이것이 바로 인간의 한계라고 말할지도 모르지만, 도망갈 곳 없는 사람에게, 혹은 목숨에 위협을 느끼는 사람에게 꺠달음이란 것은 어쩌면 너무나 사치스러운 일일지도 모른다.. 내가 혼자 세상의 모든 것이 무라는 것을 깨달으면 무슨 소용이야. 나의 목숨은 짓눌리고, 짓밟힐 것이다. 그러는 동안에. 우리는 죽임을 당한다.
생존과 수행의 상관관계를 파악하라.
목숨이 있은 후에, 깨달음이 온다.
인간의 운명은 그래, 깃털처럼 가볍고, 우주의 시간 앞에서 1찰나도 되지 않는 그런 보잘 것 없는 것인 걸 알아.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내가 받는 고통 또한 깃털처럼, 찰나처럼 받아들일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것마저 우리가 감내하고, 받아들여야한다면, 그것은 우리 자신에 대한 또 다른 학대가 될 것이다. 학대받고, 학대받고, 학대받고. 내가 없어야한다면. 내가 받는 고통은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내가 없는데, 나의 고통은 있을 수 있는가. 이 몸뚱이가 찢기었다. 이 몸뚱이가 버려졌다. 이 몸뚱이는 무엇인가? 무엇으로 설명할 것인가? 그것이 '나'가 아니라고 하면, 도대체 몸뚱이는 어디로 가야하는가. 누가 돌보아줄 것인가. 내 몸뚱이와 내게 느껴지는 고통을 분리할 수는 없다.
도대체 그 정신적 조직체라는 것은 어떻게 이동하는가. 불현듯 가장의 근심이 떠오른다. 그게 바로 어쩌면 오드라덱일까. 소멸하지 않는, 이상한 실꾸러미. 어떠한 행위도 가지지 않는. 그러나 그것은 시간을 통과한다.
내가 풀지 못한 의문은 일단 통과한다. 다시. 고통. 고통은 분리되지 않는다. 그 무엇으로부터도. 내가 다른 믿음을 가지기 전까지는. 모든 것은 믿음에 달렸는가. 그렇다.
댓글 없음: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