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요일, 9월 24, 2023

아주 천천히 요가를 했다. 히말라야 시더 인센스 스틱을 피워놓고 창문을 열어놓고. 시원한 가을 저녁의 바람과 사람들의 목소리가 창을 통해 들어왔다. 주말 저녁을 보내는 사람들의 목소리인가.
천천히 차례차례. 서두르지 않고 동작들을 해나가는 것이 참 좋다. 왜 무언가에 쫓기듯 하던 때가 있었을까. 수련을 하고 싶기는 하지만 내 몸의 무기력한 근육들과 무기력한 마음들이 그것을 끌고 갈 힘이 없지만, 어쨌거나 해나가야 했기 때문일까. 이제는 그런 마음들이 작아지는 것을 느낀다. 중요하지 않은 방향으로 뻗어나가는, 쓰여지는 에너지들이 줄어드니 진짜로 내가 써야 할 내가 쓰고 싶은 곳에 에너지를 쓰게 되는 것 같다. 걱정할 거리가 아니었던 것들을 걱정하며 때로 건강을 해치기도 했고, 마음을 다치기도 했고.
사바사나를 하는 몸이 아주 편안하고 편편했다. 사바사나를 할 때는 왜 몸을 꼼지락거리지 않는 것일까? 가끔 하던 생각이었다. 몸을 꼼지락거리고 싶은 충동이 전혀 일지 않고 고요하게 누워있을 수 있다. 결국엔 몸의 모든 부분들의 긴장이 풀어졌기 때문인 걸까. 어느 곳에 불필요한 에너지가 쓰이고 있거나, 억지로 어떤 에너지를 끌어 써야 할 때 내가 몸을 움직이고 싶은 충동이 드는 것일까. 너무 졸리지만 깨어있으려고 하니까 하지 불안이 심해지는 것을 느꼈던 날이 있다. 정확히 답을 알 수는 없지만 요즈음 그런 발견을 하고 있다.
사바사나 자세로 누워있으니, 요가의 처음부터 끝. 그게 어떤 것이 되었든 간에 그 시퀀스들이 우리가 사는 하루의 모습, 인생 전체의 모습과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몸의 이곳저곳이 열리고, 움직임과 흐름이 자연스러워지고, 그렇게 에너지가 상승했다가 점차 잠잠해졌다가, 온몸의 구석구석 힘을 빼고 완전히 땅에 기댄 몸. 뉘인 몸. 송장 자세. 송장으로 가는 생. 내 생의 모습도 요가를 하는 것처럼 계속 더 자연스럽게 만들고 싶다. 마음을 어둡고 어지럽히는 것들을 하나씩 정돈하고, 편안해지기. 요동치는 파동을 진정시키기.
눈을 감고 일기를 쓴다. 음악을 틀어놓고. 아아 좋다.

오늘은 남의 집 리빙룸에서 공연을 감상했다. 호스트의 연주와 예지님의 연주. 오래되고 아름다운 집에서의 소리들. 졸림들. 흔들림. 사람들이 누군가의 집에 모여 저마다의 영감을 떠올린다. 저마다의 이야기와 저마다의 감상들. 나는 식물을 많이 키우고 싶단 생각을 했다. 오래된 나무 색깔과 어울리는 식물들. 화분들. 그것들이 악기와 함께 놓여 있을 때의 아름다움. 그것들이 우리에게 주는 편안함. 그 편안하고 포근한 집의 느낌이 좋아. 아무것도 뚝딱 이루어지지는 않는다. 어느 것도. 아아 눈을 감고 아무렇게나 쓰는 일기가 좋구나.

내일부터는 일을 시작한다. 정해진 시간에 정해진 공간에서 정해진 업무를 한다. 새로운 루틴을 시작하는 하루다. 내가 나만의 자연스러움으로 하루하루를 만들어 갔으면 좋겠어. 어떠한 목표도 어떠한 목적도 그것이 나 자신 그 자체는 아니다. 그것이 없어도 나는 나야. 그것이 이루어지지 않아도 나는 그대로 나야. 어떤 일이 일어나도 나는 나 그대로 언제나 아름답다. 

화요일, 9월 19, 2023

여러 가지 감각과 감정이 돌아옴 혹은 재생됨을 느낀 날
갖가지 소식이 내게 전하는 메시지, 잊고 있던 소식이 끌어내는 어떤 욕망, 새로운 주제와 호기심

내가 현존하고 있는 세상을 바라볼 것
너무 올라가지도 내려가지도 멀어지지도 파고들지도 말고 말이다. 
끊임없이 벽과 구멍에서 돌아다니며 깨달은 것들이 다시금 더 밝고 분별이 가능한 차원에서 지혜로 완성된다.
나는 아주 천천히 그것들을 배우고 있어. 깨달았다고, 다 알았다고 여겼던 것들을 거듭 깨끗하고 순수한 형태로 다시 배우고, 깨닫는다. 그렇게 지속적으로 더 넓고 밝은 차원의 것으로 진화할 수 있는 것이 신기하고 또 감사해. 나에게 다가온 모든 인연과 가르침을 감사하는 마음으로 받아들여야지. 이 모든 경험을. 

토요일, 9월 02, 2023

9월이 되었다. 8월에 일기를 다시 많이 쓸 것 같았는데, 무언가를 해야겠다는 마음이 도통 일지 않아서 써지지를 않았다. 그리고 아주 아주 솔직한 마음들을 이제는 이곳에 쓰지 못하게 되기도 하여, 찾아올 마음이 안 들기도 했다. 앞으로 나 혼자만 하고 싶은 이야기는 내 개인 메모에 써두어야지.

요즘 명상 필사를 하면서 계속 들었던 궁금증이 있었는데, 어제 오지와 이야기를 하다가 오지도 같은 질문을 하는 것이었다. 중증 우울증과 명상을 통해 모든 고통과 탐욕 등 모든 감정이 사라진 고요한 상태가 되는 것에는 어떤 차이가 있을까. 그걸 어떻게 알 수 있는 거지-하는 생각. 괴로운 생각들, 부정적인 모든 잡념도 사라지고, 세상에 대한 욕심도 모두 사라진 상태를 경험했는데, 그래서 무언가를 내가 이생에서 이루어야겠다는 열망이나 의욕이 아무것도 없는 상태. 마음은 평온하고 말이다. 정말 무언가가 꺾인 느낌이 아니라, 그저 그런 모든 것들이 결국에는 환상이라는 것을, 중요한 것은 그게 아니라는 것이라는 것을 알기에. 그런데 그것이 명상을 통해 도달한 그 해탈의 경지와 어떤 차이가 있는 것일까 ? 그런 생각이 든 것이다. 결국엔 모든 욕심과 감정들의 파도가 사그러드는 그런 상태. 무언가에 도취한 상태도 모두 지나서 드는 그런 마지막의 고요한 순간 말이다. 그것의 두 가지가 차이가 있을까. 현대 사회에서 중증 우울증이라고 불리는 그 상태가 지극히도 비생산적인 상태이기 때문에 이 상태를 치료해야 할 상태로 보는 것은 아닐까. 암튼 이런저런 생각을 해보았다. 이번에 내가 느낀 상태는 여러모로 생소했기 때문에. 오지도 내가 그간 지나온 우울증의 형태와는 너무 달라서 알아채기가 힘들었다고 했다. 나조차도 그랬고. 모든 감정을 생생하게 느끼는 상태를 모두 지나고 모든 것이 평평해지고 무의 상태를 경험하는. 요가의 궁극적 목표가 모든 자기 신체와 정신을 통제할 수 있는 신과 합일된 상태가 되어 죽음에 이르는 것이라면. 지금까지 그것이 물리적 죽음이라 생각했는데, 오지가 최근에 생각했다는 대로 그것이 물리적 죽음이 아닐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새로 해보기도 한다. 아마 그럴 것 같다. 자주 이 질문들을 떠올릴 것 같다. 요가수트라 필사를 다 마치고 나면 또 새로운 질문과 깨달음이 있을지도.

요가수트라 필사 명상을 한 지는 63일이 지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