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일, 4월 09, 2022

석굴암

이안이의 생일을 축하하기 위해 서촌에서 만나기로 했다. 오지와 272번 버스를 타고 사직단으로 향했다. 올해 들어 처음으로 반팔만 입고, 가디건을 챙겼는데, 가디건은 바로 벗어버릴 만큼 더운 날이었다. 버스에 타기 전부터 흥얼거리던 노래를 함께 들으며 갔다. 창문이 많이 열려있어서 버스 안에도 바람이 시원하게 불었다. 따뜻하고 시원한 바람.

크게 '행복해'라는 말이 튀어나왔다. 오지와 나는 계속 서로를 보며 눈웃음을 지었고, 몸을 흔들거렸다. 순수한 행복의 순간이었다. 이 순간에 대해서 생각을 했다. 디 아워스에서 메릴 스트립이 했던 대사가 떠올랐다. 행복이 느껴지던 어떤 순간. 그것이 앞으로 행복한 나날들이 펼쳐질 것이라는 사인같이 느껴졌고, 기대했지만, 그런 일은 펼쳐지지 않았다고. 행복은 그저 그 순간이었던 것이라는 말. 나는 오늘 따뜻한 바람을 맞으며 느꼈던 행복을 맘껏 즐겼다. 즐거운 상상들, 즐거운 착각들 모두 펼쳐지는 대로 내버려 두었다. 버스 안이 환했다. 사람들도 모두 따뜻한 바람을 즐기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약속 장소는 서촌의 노부였다. 이안이는 맛있는 소바가 먹고 싶었다고 했다. 기대에 가득 차서 음식을 주문했지만 그만큼 만족스러운 맛은 아니었다. 입맛이 요즘 뚝 떨어진 우리에게 그리 좋은 선택은 아니었던 것 같다. 봄이라 그런지 다들 입맛이 없다고 했다. 이안이는 얼른 시원한 음료를 마시고 싶다고 했다. 이안이의 생일을 축하하기 위해 디저트를 샀고, 카페에 가서 잠시 티타임을 즐겼다.

우리는 카페를 나와 수성동계곡으로 향했다. 나들이 나온 사람들이 많았다. 언제 세상이 이렇게 연두색이 되었지. 우리는 정자에 앉아서 생일 축하 노래를 불렀다. 작고 달콤한 디저트들에 초를 꽂고, 축하를 하고, 이안이는 소원을 빌었다. 우리는 꽤 한참 정자에서 쉬었다. 끝없이 초록을 감탄하기도 하고, 이상하고 징그러운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다.

진주는 석굴암에 우리를 데려가기로 했다. 길은 잘 모르겠지만 느낌으로 갈 테니 잘 따라오라고 했다. 다행히 석굴암 가는 길은 잘 표시가 되어있었다. 우리는 끝없이 펼쳐진 계단을 올랐다. 올라가는 길에는 우리밖에 없었다. 계단을 오르다가 중간중간 쉼터에 서서 서울 풍경을 즐겼다. 우리는 점점 높아졌다. 석굴암이 거의 가까워지자 개나리들이 즐비했다. 뒤를 돌아보면 서울의 건물들이 빼곡한 잔디처럼 펼쳐져 있었고, 우리 앞에는 노란 꽃들과 초록 잎들만 가득했다. 우리는 너무너무 행복했다. 다시 이곳에 오기로 거듭 약속했다.

석굴암에 들어갔는데, 그 안은 추울 정도로 시원했다. 나와 오지, 이안이는 부처님 앞에서 절을 했다. 브이로그를 열심히 제작하는 진주는 절을 하는 우리를 찍었다. 삼배를 하기로 했는데, 촬영을 하는 진주를 위해 두어 번 더 절을 했다. 절을 하고 있으니, 한 보살님께서 들어오신다. 이 공간에 와서 기도도 하고, 자리를 지키시는 분이라고 했다. 주말에는 원래 스님이 계시는데 오늘은 다른 곳에 가셨다고 했다. 절을 하고 있는 우리를 정말 예뻐해 주셨다. 어른들이 삼천배를 하는 것보다 우리처럼 어린 친구들이 삼배하는 것에 더 큰 에너지가 있다고 말씀하시며, 커피를 타주셨다. 어쩌다 오늘 이곳에 오게 되었는지, 몇 살인지, 직장은 다니고 있는지 등 어른들이 으레 하는 질문들을 하셨다. 거듭 우리에게 결혼할 나이가 되었다고 하시며, 이렇게들 몰려다니면 연애는 언제하고 결혼은 언제 하냐고 핀잔을 주셨다. 본인의 아들은 혼기를 놓쳤다며 걱정을 하셨다. 어른들의 말은 가끔 지루하지만 그래도 왠지 그 시간은 재밌었다. 어떤 기도를 하고 계신지 궁금했지만 물어보진 못했다. 다음에 또 만나 뵙게 되면 물어봐야지. 인왕산 이야기가 나와서, 석굴암에는 인왕산 정상으로 가는 길이 없다고 표지판에 쓰여 있었다는 이야기를 하자, 보살님께서는 알려지지 않은 길이지만 길이 있다고 알려주셨다. 비밀이니 사람들에겐 퍼뜨리지 말라고 하셨는데, 이 일기에는 써도 되겠지 ?

이야기를 마쳐갈 때쯤에 한 아저씨께서 양초 박스를 석굴암에 내려놓으시며 보살님과 인사를 나누셨다. 사실 석굴암을 오르는 초입 계단에 양초 박스가 가득 쌓여있었는데, 박스들에는 석굴암을 오르는 사람들에게 부탁하는 메시지가 적혀있었다. 이 양초들을 석굴암으로 가져다 달라는 부탁의 말이었다. 그걸 보면서 우리는 웃고 말았는데, 정말 누군가는 들고 올라왔다. 인왕산 정상으로 향하기 위해 나오자, 그 아저씨는 본인도 그 비밀스런 통로로 정상을 가는 길이라고 하셨고, 우리와 동행해주셨다. 보살님은 우리에게 인사를 하며 계속, 복 받은 날이라고 외쳐주셨다. 아저씨를 따라서 길이 아닌 길로 올라갔다. 나는 치마를 입고 있었고, 이안이는 슬리퍼 같은 신발을 신고 있었다. 아무도 산을 오르는 준비를 하진 않았지만 우리는 모두 산을 오르고 있었다. 그것도 비밀스러운 산길로 !

아저씨는 정말 친절하셨고, 우리가 외치는 말들 하나하나에 다 공감을 해주셨다. 그게 너무 귀엽고 재밌었다. 우리가 발견하는 것들에 동참하시며 같이 즐거워해 주셨다. 올라가는 길엔 이상한 구조물을 발견했다. 아주 커다란 바위에 기둥을 누가 세운 것인지 동굴처럼 만들어진 희한한 공간이었는데, 우리는 이곳을 우리의 아지트로 삼자고 했다. 다시 산을 올랐고, 곧 사람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공식적인 산행로에 다다랐다. 우리는 이제 그 길을 따라 정상으로 향했다. 정말 얼마 만에 온 인왕산 정상이지? 정상에 오르니 많은 사람들이 바위에 앉아있었다. 저녁이 다 되어가는데도 사람들은 계속 산을 오르고 있었다. 정상에서 아저씨가 우리 네 명의 사진을 찍어주셨다. 아저씨는 내려가는 길도 함께 해주셨는데, 계속 우리랑 같이 까마귀 구경도 하고, 철봉도 하고, 소리도 치고, 나무를 만지기도 했다. 너무 즐거웠다. 우리가 절에 함께 가는 날이면 항상 재미있는 일들이 일어난다. 항상 귀인을 만나는 것 같았다. 이안이와 작년 이맘때쯤 승가사에 갈 때에도 트럭으로 우리를 데려다주던 아저씨를 만났었는데 말이다.

산에서 내려오자, 아직 여전히 세상은 밝았지만 저녁 빛으로 변해있었다. 달이 너무 예쁘게 떠 있었다. 행복에 가득 차서 우리는 헤어졌다.

오랜만에 열심히 활동했는데도 오지와 나는 입맛이 없었다. 신선한 것이 먹고 싶어서, 포케를 주문했고, 다행히 정말 정말 맛있게 식사를 마쳤다. 식사를 마치자마자 오지는 안락의자에서 잠시 졸았고, 나는 차분한 음악을 틀어놓고 일기를 쓰는 중이다. 많이 피곤하다. 푹 잤으면 좋겠네 오늘. 4월은 내가 다시 불의 기운으로 지낼 수 있는 때라고 했는데, 정말 신기하게도 3월 내내 집에 숨어지내다가 4월이 되자마자 바빠졌다. 이번 주에 많은 사람을 만난 것 같네. 이리저리 쏘다니는 말로 돌아온 것 같다. 계속 숨어지내고 싶을 것 같았는데, 이 만남들이 아주 즐겁다. 날씨도 사실 한몫하고 있다. 마음에 사랑이 가득 차는 날씨. 곁에 있는 누구라도 꽉 안아주고 싶어지는 나날들 ~ ~ 행복해라. 행복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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