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요일, 4월 28, 2020

우리는 여기에



오늘 수피들의 세마의식을 해보았다.
수년동안 내 앞에 나타나고 사라지고, 또 다시 나타나는 이 신호들이 이제는 더 명확해질 때가 됐다.
거울각성의 시간이란 것이 어쩌면 그런 것일까.
내 모래는 밀물과 썰물의 무한한 움직임 속에서 온 몸이 잠겼다가 다시 뭍이되었다가를 영원히 반복했다.

오직 사랑하는 이와 함께 있음으로 얻는 순수한 환희 -
그 짤막한 행복에 관한 구절이 시작이었다.

수년이 지나고나서야 -
나는 다시 수피라는 단어를 듣게 되었다.
이미 이전에 제라드가 수피들의 원무를 보여준 적이 있다.
그리고 오늘, 거울각성에 대한 칼리의 이야기를 듣다가..
수피들의 세마의식에 대한 내용까지 들었다.
나는 준비가 되지 않았다.

대신 더듬더듬 거슬러 올라가 우리에게 필요한 소리를 들었다.
그러다 제목에 이끌리어 난생 처음 보는 가수의 노래소리에서 나는 또 다시 내가 기억하지 못하는
무언가와 재회를 한 것이다. 이미 다 알고 있었던 것이다. 이미 다 보았던 것이다.
그의 음악을 틀고 나는 좋은 향기를 맡으며 아주 편안하고 엷은 행복을 느꼈다.
그러다가 수피들의 원무를 추게 된 것이다.
아주 편안하게.
천천히 돌고 있었지만 내 손바닥 뒤의 세상은 이미 흐릿하게 그리고 아주 빠르게 돌아가고 있었다.
계속 사라지고, 다시 돌아오고, 내 눈앞에 보이는 것은 나 자신 뿐이었다.
오늘 처음 들은 음악에 맞추어 계속해서 돌았다.
너무 아름다워 눈물이 났다.
왠지 모르게 이 동작이, 이 원무가 내게 두렴을 가져다줄 것만 같았는데..
아주 아름답고 편안한 움직임이었다.
고양이는 문앞에 앉아 나를 바라보았다.

월요일, 4월 13, 2020

우리가 죽으면 거대한 열반이 있고, 그다음에 소멸이 있습니다. 

불꽃은 계속해서 살아있으며, 다른 상태로 지속된다고 생각했고, 따라서 열반이 반드시 지금의 소멸을 의미하지는 않는다는 것입니다. 열반 후에도 우리는 다른 방식으로 계속 존재하는데, 그것은 우리가 생각할 없는 방식이라는 것입니다. 

열반을 말할 우리는 열반의 포도주나 열반의 장미 또는 열반의 포옹을 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섬에 비유합니다. 폭풍 속에서도 굳건히 버티는 말입니다. 물론 정원이나 탑에 비유할 수도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의 생각을 넘어서서 스스로 존재하는 것입니다. 



() () 아닌 () 상태. 

금요일, 4월 10, 2020

모래사나이

모래사나이를 읽었다.

오래전에 체험했던 공포 혹은 마음 속에 새겨진 불안의 씨앗.
그 무서운 일이 반복될 것이라는 두려운 예감.
결국에는 그 일이 일어나 나를 집어삼키고야 말 것이라는 예감. 
아니 확신에 가까운 믿음.

오늘 밤새도록 무섭고 끔찍한 체험을 했다.
실제로 꿈 속에서 나는 믿을 수 없을만큼 생생한 감각 속에 괴로워했다. 몸은 한없이 무겁고, 동작은 느렸다. 그런 와중에 마음 속으로 나는 '정신을 똑바로 차려야 한다'고 되내었다. 몸은 지금 내 맘대로 움직이지 않고, 위험에 쳐했다지만, 정신을 똑바로 차리고, 바른 말(?)을 할 수 있도록 나는 노력했다. 마치 내 다리의 한쪽은 꿈 속에 걸쳐있고, 다른 한쪽은 깨어있는 세상에 걸쳐져있는 것 같았다. 그 가볍고 얕은 꿈은 아주 작은 소음에도 나를 소스라치게 놀라게 만든다.
본디 잠잠하고 평온한 심장에 그런 씨앗이 생겼다는 것은 참으로 애석한 일이 아닐 수가 없으나..
이미 생겨버린 씨앗은 아마 평생 제거할 수 없을테니, 나는 평생동안 그것을 달래고 어스르는 일을 해야만 한다. 나의 카르마.

왜 그토록 행복하고 평화로운 밤을 보냈으면서도, 나는 악몽에 시달려야만 했을까 ?
심장이 하는 일을 도통 나는 알 수가 없다. 며칠째 너무 얕은 잠을 자느라 심장에 무리가 온 것 같다.
이제는 커피를 마시지 않아도 눈을 뜨자마자 다리에 불편한 느낌이 든다. 붕 떠 버릴 것처럼 가볍고 가려운 다리를 쉴새없이 움직이고 있다.

그러나 결국 이 모든 것들도 내 마음이 하는 일이란 것을 안다. 클라라의 외침이 바로 나의 외침이었으나, 모래사나이를 생각하는 동안, 죽음 본능이 다시 힘을 얻고만다. 그 불안으로의 회귀. 너무나도 잠잠하고 평화로운 상태를 견딜 수 없는 비극적인 본능. 

목요일, 4월 09, 2020

망우리집

지겹지도 않은지.
평생의 꿈 속에서 나는 그 집에서 이사나갈 수 없을지도 모른단 생각을 했다.
그러나 어쩌면 그러는 편이 낫다.

금순이이모 오지 엄마 나
엄마는 저녁 내내 내가 자고 있는 그 저녁 내내 부엌일을 하고 있었다.
달그락달그락 설거지 소리.
중간에 엘로디가 자꾸 내 방에 와서 뭘 물어봤다. 물건을 찾는 것인지, 물건 사용법을 묻는 것인지.
꿈인지, 생신지 알 수 없는 소음들과 방문들(visites)
이래 저래 정리하고, 수선을 하다보니 아침이 되었고 다들 제각각 집을 나서게 되었다.
나만 혼자 집에 남아야 했다.
이모가 제일 먼저 나갔다.
이모가 문을 열고 나가는 순간에 낯선 흑인 꼬마아이가 무척이나 천진한 표정으로 신발장 앞까지 들어와버렸다. 그를 밖으로 내보내고 금순이 이모는 문을 잠그는 시늉을 계속 했다. 실제로 잠그지는 못했고, 낯선이들을 속이기 위한 행동이었다. 이내 곧 그 꼬마보다는 더 큰 아이가 나타나서 이번엔 이모 콧구멍을 살짝 찌르는 장난을 쳤다. 여전히 천진한 얼굴.
그러나 너무 섬뜩했다.
항상 나는 이 집의 이 허술하고 허약한 유리문이 너무 싫다.
이윽고 오지와 엄마가 나갔다. 그 순간에 나는 문을 잽싸게 잠그기 위해 필사적으로 힘을 썼다. 그 작고 보잘 것 없는 문고리를 잠그는 일이 이렇게나 힘든 일일 줄이야. 항상 그 문은 아주 잠깐이라도 열려있는 틈을 타고 누군가가 침입한다. 그래서 늘 꿈 속에선 현관문을 잠그는 것이 나의 주된 임무다.
그 유리문의 재질이 무엇인가하고 찾아보니, 워터큐브 유리란다. 그 울퉁불퉁하고 불투명한 유리는 낯선이가 그 앞에 서면 단박에 이상한 낌새를 알아채릴 수 있도록 그의 실루엣이 고스란히 보이지만, 우리를 그저 그 이상하고 무섭고 소름끼치는 상황에서 벗어나게 하는데는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그 유리문 앞에 검은 몸이 움직이고, 나는 문을 잠가야하지만 몸이 마음대로 움직여지지 않는 꿈을 수없이 꿨다. 등에 식은땀이 흘러내리고 당장이라도 죽고싶은 그런 두렴.
게다가 그 불투명한 유리는, 누구라도 주먹을 휘두른다면 허무하게 깨질 수 있을 정도로 허술하고, 튼튼하지 못했다. 실제로 누군가 던진 계란에 유리문은 깨져 구멍이 나버렸다. 왜 아무도 유리문을 고칠 생각은 하지 않았을까 ? 그 깨어진 부분에 종이를 붙여 바람만 막아놓았다.
유리는 고사하고, 문고리는 그 존재조차 있으나 마나 한 것이었다. 어떤 열쇠로도, 문을 열 수 있는 그런 고리였다. 심지어 동전을 이용해서 열 수도 있었다. 열쇠를 잃어버려 집에 못들어갈 걱정은 안해도 되는 문이었지만, 누구라도 침입할 수 있는 문이었다.
이렇게 말하고 보니, 내 악몽에 언제나 망우리집이 나올 수 밖에 없는 이유를 알았다.
누구라도 침입할 수 있는 집.
누구도 안전할 수 없는 집.
다시는 돌아가고 싶지 않은 집.
그 집을 다시 만날 일이 꿈 속 말고는 없을 것이란 사실이 차라리 안심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