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을 가지고 있는 누군가
그 때에 이상한 노래소리가 들리곤 했다. 공사장 인부의 노래소리
그곳은 황량한 사막이었다.
나는 때가 되면 거울을 하늘에 비추고 그 돌. 펜듈럼을 갖고 있는 자의 것이 거울 속으로 빨려들어갈 수 있도록 해야했다.
해가 낮아졌고 내가 거울을 들고 그리고 나마지 돌멩이 하나를 손에 쥐고 갔을 때. 이상하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느낌으로 알 수 있었다. 그것을 가진 이거 그 펜듈럼에 자신의 영혼을 넣어버린 것이다. 찾을 수가 없게되었고 그것은 어쩌면 예상된 일이었다. 옆에 있던 부부. 여자는 분홍색 천 얼굴만 가려지는 크기의 천이 시야를 모두 가리고 있는 형태로 하고 있었다. 머리와 나머지 몸은 검은색 차드로 가려져있었고 옆에 남자는 여전히 콧노래였다. 여자는 슬퍼하고 있었다. 이런 일이 벌어진 것에 대해 아주 슬퍼하고 있었다.
월요일, 5월 07, 2018
짜증박사
우리 엄마가 자주 쓰는 말이다. 웃겨죽겠다. 오지와 우리 가족내력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중이었다. 우리 가족은 내구성이 떨어진다. 관절 안좋고, 장기 안좋고, 신경예민, 짜증대박. 좋은게 하나도 없다. 오지은이 기능은 좋다고 했다. 다들 일은 잘하고, 똑똑하다. 것 말고는 여기저기 아프고 쑤시고, 예민하고, 짜증 잘 내고 웃겨죽겠다.
아까는 이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 누구라도 행복하고 평온하고 안정적인 사람을 만나고 싶을 것이다. 그런 마음이 드는게 당연하다. 행복하게 살아온 사람은 행복하게 살아온 사람이랑 잘 어울릴 것이고, 조금 행복하지 못하게 살아온 사람도 당연히 행복한 사람이랑 만나고 싶을 것이다. 아무도 불안정하고 슬픈 사람을 만나고 싶은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슬픈 사람은 도대체 누구와 사랑을 할 수 있는 것일까? 슬픈 사람은 누굴 만날 수 있을까?
난 너무 슬퍼졌다.
그렇지만 그건 아주 쓸데없는 생각이었다.
나에게는 사랑하는 이가 있다.
금요일, 5월 04, 2018
프랑스에 있는 나
내 동생이 nihil이라는 제목의 글을 남겼다. 내 동생의 허무 혹은.. 허무의 반대말을 쓰려고 하다가 생각이 나질 않아 멈추었다. 그래. 그것은 실존이었다. 다시, 그것은 내 동생의 허무 혹은 실존에 관한 이야기였다. 나는 동생에게 먼저 이야기를 들었을 때처럼, 동생이 아빠와 싸우다가 '아빠 다리'를 한 채 아빠에게 사과를 했다는 대목에서 또 웃음이 터지고 말았다. 참 웃기다. 그 앉은 모양새의 이름은 왜 아빠 다리일까. 이따금씩 별 의미없이 쓰던 말들이 이상하게 느껴지는 때가 있다. 아빠 다리를 한 채, 아빠에게 사과를 했고, 아빠는 그것이 사과하는 사람의 태도냐고 물었다고 했다. 정말 누구라도 웃지 않을 수 없는 대목일 것이다. 그렇지만 그 글의 말미에 가서는 눈물이 나고 말았다.
엄마는 숨소리도 들리지 않게 조용했는데, 코끝이 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이걸 쓰면서 또 눈물이 난다. 엄마의 생일을 하루 앞두고 내 동생이 겪은 아빠와의 다툼, 그리고 그 전에는 서울에 우박이 쏟아졌다는 이야기. 그것들은 다 무슨 조화일까. 우리의 실존이 실재하는 한 허무라는 것은 있을 수 없을지도 모른다. 오지은은 한번도 허무한 적이 없으며, 실존하지 않은 적이 없다. 자신이 허무하다고 느낄 때에도, 그를 아는 누군가가 한명이라도 있을 때에, 혹은 그가 남긴 글이 하나라도 있을 적에는, 그는 허무가 아니다. 우리가 어떠한 가정을 하더라도, 설사 이 세상이 아무 것도 아니라는 가정, 모든 것은 결국 무, 아무 것도 없는 것이라는 가정을 해보더라도, 그 모든 상황들은 우리가 가정한 실존의 상태이다. 결국 우리가 생각해낸 모든 것들이 진정으로 이 모든 세상에서 다 사라지고 났을 때에 허무란 것이 가능할 것이다. 허무가 가능하다. 이 말도 웃기다. 다시, 그렇기에 또 모든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말할 수 있다. 아무런 의미가 없다. 아무런 의미가 없다.
아무런 의미가 없다. 생각해보니 어젯밤 나도 계속해서 이 말을 되내었는데. 살아갈 의지가 없을 떄는 생의 의미를 찾게 되고, 진정으로 살아있을 때에는 생의 의미라는 것이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식의 생각이었다. 요즘 내가 생의 의미를 찾고 있지 않다는 것을 깨닫고는 일게된 사실이다. 어젯밤에는 오늘 내가 또 생의 의미를 찾게 되진 않을까 약간 두려웠지만, 다행히 오늘도 나는 생의 의미를 찾지 않고 하루를 보내고 있다.
나는 프랑스에서 지내고 있다. 프랑스에서 지내며 글을 쓰고 있는 내 모습이라니, 이것은 내가 이전에 무척이나 바래왔던 모습이다. 이 곳에서 나는 매일 사진을 찍고, 산책을 하고, 밥을 먹는다. 내가 바래왔던 모습이었지만, 막상 그 모습을 하고 있는 나는, 내가 그런 모습을 바랐다는 것 조차 잊고 있었다. 내 동생이 글의 첫 머리 즈음에서 언니는 프랑스에 가 있다고 언급한 덕에 내가 정말 프랑스에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프랑스에 가 있는 언니라니. 마치 어떤 소설의 주인공의 언니가 된 것 같았다. 내가 소설의 주인공은 아닌 것 같았다. 그래서 나도 갑자기 글을 써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요즘엔 동길이에게 쓰는 메일 말고는 글을 그렇게 많이 쓰는 것 같지가 않다. 꼭 글을 쓰는 법을 잊어버리고 말 것만 같은 두려움이 가끔씩 찾아온다. 그것은 내 실존에 대한 위협일 것이다. 어쩌면 글을 남기는 것이, 사진을 찍는 것이 나의 실존을 확인하는 일일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그토록 나는 기록하는 것에 집착에 가까운 열정을 가지고 있는 것일까. 그것은 내 실존에 대한 집착이자 열정인 것일까. 오늘은 무엇도 깨우치지 않는 글을 쓰려고 했지만 나는 또 다시 이런 짓을 하고있다.
나는, 단지, 어디론가 향하는, 무엇인가를 해나가는 이야기를 쓰고 싶었다. 나는 오늘 무엇을 했지. 오늘은 일어나 밥을 먹고, 담배를 피우다가 카페에 갔다. 오랜만에 라떼 한잔을 먹었고, 바나나 브레드도 한조각 먹었다. 꼭 상상했던 맛이어서 기분이 좋았다. 그리고 친구와 타로카드를 몇번 뽑아보고는 버지니아 울프의 '자기만의 방'을 몇 페이지 읽었다. 옆 테이블에 앉은 사람들의 목소리가 너무 커서 글자가 눈에 잘 들어오지 않았다. 그래. 어쩌면 오늘은 참으로 자기만의 방이 필요한 날이었다. 책을 읽어내려가는 동안에도 나는 몇번이나 커다란 목소리들에 방해를 받았고, 이 글을 써내려가는 데에도 작은 방해물이 일어나고 있다. 이를테면, 오랜만에 커피를 마신 탓에 자주 오줌이 마려워지는 것이라든지, 개똥벌레라든지, 술에 취한 동길이의 전화라든지. 그러나 그들을 미워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우리는 모두 한 방에 있었고, 그곳에도 이곳에도 나만의 방은 없었기 때문이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곤, 막스 리히터의 음악을 틀어놓고, 이 하얀 배경 위에, 검은 글씨들이 생겨나는 페이지에 온전히 집중하는 일이다. 오늘은 밖에 나가서 놀려고 했던 계획도 포기했다. 저녁이 다가올 무렵에 집 근처 골목에서 파이프를 피우고, 노래를 들으며 몸을 움직여 보았다. 그러고 집에 돌아오니, 아, 그 때였다. 내가 대문을 여는 순간에 내 동생이 보내준 글을 읽기 시작했다. 그 글을 읽으면서 나는 '아빠 다리'에서 웃음을 터뜨렸고, 엄마의 미간 주름, 엄마의 빨갛게 달아오른 코를 읽으며 눈물을 흘렸던 것이다. 그렇게 다시 이 방으로 돌아온다.
나는 아주 차분해졌고, 조용해졌다. 그러나 다시 나는 자기만의 방의 필요성을 절실히 느낀다. 써내려갔던 몇 줄의 이야기들을 결국엔 모두 지워버렸고 잠에 들기 전에 이 글을 고친다. 모든 것이 흐트러져버렸고 배가 고프고 잠이 오질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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