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요일, 12월 31, 2023

버스를 타고 후아힌에 가고 있는데, 창밖으로 보이는 하늘이 너무나 가깝게 느껴졌다. 하늘이 너무 가깝고, 무한한 사랑을 느끼는 것이 너무나 수월하다. 움츠러든 심장을 펴고 세상을 받아들이고 세상을 느끼는 것이 아주 쉽다. 그러다가 서울을 떠올렸고, 내가 서울에서 태어나 살고 있는 이유를 알았다. 내가 왜 아시아인으로 태어났는지, 그 중에서도 왜 서울에서 태어났는지. 내가 어릴 적에 늘 그곳을 떠나고 싶어 했던 이유도. 그러나 이제는 내가 어디에 살아도 상관없음을 알게 된 이유도. 오히려 내가 그곳에 있어야 하는 이유도. 모두 다 알겠다. 마주하는 이들이 아름다운 미소와 인사를 건네는 곳에서는 사랑을 느끼는 일이 너무나도 쉽다. 금방이라도 가슴에 사랑이 가득해지고, 그것을 유지한 채로 사는 것이 참으로 쉽다. 

지난여름, 지량과 뉴욕을 여행하며 느낀 것. 그 복잡함과 더러움, 폭력성을 바라보다가 그것들을 나의 일부로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얼마나 내가 더 크게 용서해야 하는지, 더 크게 사랑해야 하는지를 배웠던. 그렇게 더 큰 사랑을 배우기 위해서는 더 큰 역경을 건너야 한다는 것을. 복잡하고 밀도가 높은 서울에서 산 나의 나날들이 스쳐 지나갔다. 내가 겪은 폭력과 고통. 그 사이에서 내가 살고 지나야 했던 과정들이 있었음을 이제는 애쓰지 않아도 알 수 있다. 보리수 아래 앉아서 명상하고 있는 누군가가 그 안에서 넘어서고 있는 두려움과 고통의 상상이었을지도 몰라. 그것을 하나 넘으면 큰 안도가. 그리고 더 큰 고통을 넘으면 그보다 더 큰 안도가 있었다. 그렇게 계속해서 두려움을 한 꺼풀씩 벗겨내고 나면 더 가벼워진 나를 본다. 본래의 순수한 내가 있음을 알게 된다. 서울에 있다가 방콕에 오니 내가 이 세상과 연결되어 있음이 더욱 선명하게 느껴진다. 눈으로 보이는 모든 것들이 눈을 감으면 모두 사라지는 것이 왜인지를. 당연하여 인식한 적이 없던 그 현상을 인지하니 세상을 이루는 것들은 내가 눈으로 인식하고 있는 저 전깃줄도, 벽도, 빨래 더미도, 사람들도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다. 눈을 감으니, 그것들이 모두 보이지 않았다. 내 눈이 보는 것이 진정으로 내가 보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의식적으로 내가 닿으려고 하지 않아도 나는 이미 연결되어 있었다. 이 땅의 일부로 존재하는 나를 느낀다. 이 땅이 나임을 느낀다.

아주 많이 덜컹거리는 작은 버스를 타고 있다. 버스를 타고 있는 내 몸이 거세게 흔들릴 때마다 내 안에 있는 물이 떠올랐다. 덜컹일 때마다 흔들리는 물결과 이리저리 튀는 물방울. 그것은 참 자연스러운 일이기도 했지만 이내 곧 그걸 지켜보다가 흔들리는 몸 안에서도 고요하게 담겨 있는 물을 그려볼 수 있었다. 언제 어디서라도 고요하게 존재하는 그러나 여전히 유연하고 부드러운 물을 본다. 이 고요한 물을 기억하며 서울에서 살 생각을 한다. 나무 자세, 브륵샤 아사나를 하는 이유를 요즘 들어 많이 생각했는데, 그것을 오늘 더 이해하게 된 것 같다. 집중한다면 한 발로도, 정수리로도 이 땅 위에 곧게 설 수 있음을. 그렇게 울퉁불퉁한 땅 위를 걸어도 고요한 물을 기억한다.

댓글 없음: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