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여름, 지량과 뉴욕을 여행하며 느낀 것. 그 복잡함과 더러움, 폭력성을 바라보다가 그것들을 나의 일부로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얼마나 내가 더 크게 용서해야 하는지, 더 크게 사랑해야 하는지를 배웠던. 그렇게 더 큰 사랑을 배우기 위해서는 더 큰 역경을 건너야 한다는 것을. 복잡하고 밀도가 높은 서울에서 산 나의 나날들이 스쳐 지나갔다. 내가 겪은 폭력과 고통. 그 사이에서 내가 살고 지나야 했던 과정들이 있었음을 이제는 애쓰지 않아도 알 수 있다. 보리수 아래 앉아서 명상하고 있는 누군가가 그 안에서 넘어서고 있는 두려움과 고통의 상상이었을지도 몰라. 그것을 하나 넘으면 큰 안도가. 그리고 더 큰 고통을 넘으면 그보다 더 큰 안도가 있었다. 그렇게 계속해서 두려움을 한 꺼풀씩 벗겨내고 나면 더 가벼워진 나를 본다. 본래의 순수한 내가 있음을 알게 된다. 서울에 있다가 방콕에 오니 내가 이 세상과 연결되어 있음이 더욱 선명하게 느껴진다. 눈으로 보이는 모든 것들이 눈을 감으면 모두 사라지는 것이 왜인지를. 당연하여 인식한 적이 없던 그 현상을 인지하니 세상을 이루는 것들은 내가 눈으로 인식하고 있는 저 전깃줄도, 벽도, 빨래 더미도, 사람들도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다. 눈을 감으니, 그것들이 모두 보이지 않았다. 내 눈이 보는 것이 진정으로 내가 보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의식적으로 내가 닿으려고 하지 않아도 나는 이미 연결되어 있었다. 이 땅의 일부로 존재하는 나를 느낀다. 이 땅이 나임을 느낀다.
아주 많이 덜컹거리는 작은 버스를 타고 있다. 버스를 타고 있는 내 몸이 거세게 흔들릴 때마다 내 안에 있는 물이 떠올랐다. 덜컹일 때마다 흔들리는 물결과 이리저리 튀는 물방울. 그것은 참 자연스러운 일이기도 했지만 이내 곧 그걸 지켜보다가 흔들리는 몸 안에서도 고요하게 담겨 있는 물을 그려볼 수 있었다. 언제 어디서라도 고요하게 존재하는 그러나 여전히 유연하고 부드러운 물을 본다. 이 고요한 물을 기억하며 서울에서 살 생각을 한다. 나무 자세, 브륵샤 아사나를 하는 이유를 요즘 들어 많이 생각했는데, 그것을 오늘 더 이해하게 된 것 같다. 집중한다면 한 발로도, 정수리로도 이 땅 위에 곧게 설 수 있음을. 그렇게 울퉁불퉁한 땅 위를 걸어도 고요한 물을 기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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