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나 양극성이 문제지. 소생불가한 지경으로 치달아버린 삶을 그려보았다가 금새 몸을 튼튼하게 하는 약들을 챙겨먹고, 요가를 하고, 명상을 하고, 기도를 해본다. 건강하게 해주세요. 등이 굽지 않게 해주세요. 나는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사람이다. 이런 주문들도 외워본다. 이렇게라도 해야 그 문제로부터 나를 구할 수 있으니까. 좋은 삶을 살고 싶은 욕망이 너무나 큰 나머지 어쩔 때는 삶을 망가뜨려버리고 싶은 것이다.
그래서 나쁜 말을 많이 했다. 그치만 치사하게도 삶은 단순하다. 내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그래서 단순한 주문을 외워야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단순한 문장들을 온 맘 다해 믿으면 되는 것이다. 근데 그 믿음이라는 것이 또 문제다.
나에게는 믿음이 부족했다. (물론 내 믿음이 이렇게 희미해진 데에는 이유가 다 있다.) 사실 생각해보면 내가 그토록 머리를 이리저리로 굴려가며 시도했던 것 ㅡ 이 세상에 대해, 인간이라는 존재에 대해 어떤 해답이라도 찾으려 했던 노력 ㅡ 은, 적어도 나에게는, 참 무의미했다. 물론 그 탐구는 재미있긴 했다. 매번 내가 새로운 법칙을 발견할 때마다 느꼈던 새로운 감동이 있었으니까. 그치만 내 이십대를 가득채웠던 그 궁금증은 시들기 마련인 것이었고, 나는 새로이 깨달을 것을 찾는 것이 힘들어졌다. 나를 누르는 허무함이 하는 일인지, 내가 변해서 그런 것인지는 모르겠다. 아무튼 그 발견들은 나를 계속 다시 일어나게 하는 것이었는데, 결국에 그 발견들에 내 생의 가치를 맡기는 것은 어리석고 때로는 위험한 일이었다. 이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든, 그 속에 어떤 법칙이 있든지, 숙명이라는 것이 있든, 운명이란 것이 있든, 혹은 그 아무 것도 존재하지 않든 간에, 나는 적어도 믿음이란 것을 가질 수 있었는데 말이다. 나 자신에 대해. 이 세상에 어떤 법칙이 있다하더라도, 어떤 경우에도 생존할 수 있는 손쉬운 방법이었다.
그러고보니 기도하는 법을 잊어버린 것 같다. 창피하게도 사실 내가 요즘 기도라 이름붙였던 것들은 불안할 때에 내가 외치는 외마디 비명에 불과할 뿐이었다. 내가 소망하는 것은 아무 것도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하늘에다가 땅에다가 깽판을 쳐보기도 했지만, 지금 돌아보니 어떤 것은 이미 이루어져있네. 어릴 때 내가 간절히 손모아, 무릎을 꿇고 빌었던 기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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