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일, 4월 28, 2018

5시부터 7시까지의 클레오

5시부터 7시까지의 클레오를 보았다. 클레오. 플로랑스. 파리에서 보는 아녜스 바르다의 영화는 그 무엇보다 아름답고 서글프고 우스웠다. 나는 매일같이 클레오가 되었다가 플로랑스가 되었다가를 반복하고 클레오와 플로랑스의 불안이 시간을 채운다. 미는 추이고, 추는 미다. 평온과 부유 곁에 불안과 가난이 있다. 하나의 시공간 속에서 이렇게도 대립되는 영상들을 발견할 수 있는 곳이 파리말고 또 있을까하는 생각을 한다. 개구리를 먹는 아저씨와 아름다운 모자가게, 평화롭고 여유로운 정원, 카페에 앉아있는 사람들, 길 위에서 자는 사람들ㅎ 매일 그들을 지난다. 지금의 나는 그 어디에도 안착하지 아니한 채, 그 어느 곳에도 편입되지 않는다. 모두가 자유하지 아니하고, 모두가 배불리 먹을 수도 없고, 모두를 위한 사랑도 없다. 죽음이 두려운 때에는 생의 풍경이 선명하고, 생이 두려울 때에는 죽음의 풍경이 선명하다. 그래. 두려움이란 것은 끝이 없는 것이다. 그러나 어쩌겠는가. 결국에 이것들은 그늘 없는 풍경에서도 아름답고, 빛이 희미한 풍경에서도 아름답다. 어쩌면 이것은 거대한 비극이다. 검은 선글라스는 언제라도 벗어버릴 수 있지만 그것은 언제나 다시 내 가방 속에 있다. 비둘기는 땅에 붙어있는 것들을 쪼아먹는다. 길가 곳곳에 뿌려진 오줌길. 흐르는 물줄기. 어느날엔 물줄기를 따라 물이 시작되는 곳을 찾아가본다. 고양이는 잘 보이지 않는다. 이것이 가장 슬프다. 그러나 지금 갑자기 나는 아주 이상한 안도감을 느낀다. 내가 비극이라 부르는 것 속에서도 기어코 아름다움을 찾아나서다니ㅎ 각자의 비극 각각의 비극은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것인데.. 그치만 내가 그 길에서도 나무가 흔들리는 것을 보고 꽃잎이 흩어져있는 것을 보았단 사실을 떠올리고는 참으로 이상하고 우스운 안도를 하는 것이다.

토요일, 4월 07, 2018

내 친구 석희선의 글을 읽고

나도 평생 이런 사람이다. 나는 언제라도 슬픔을 꺼낼 수 있다. 끊임없이 나의 처량함을 본다.

때로는 다른 이들의 몸을 통해 내 처량함을 본다. 그리고 내가 어쩌면 그들의 몸을 훔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느 때에는 그들의 처량하고 고단한 몸을 발견해내려는듯 이리저리 떠돌아다니며 사진을 찍는 내 자신에 다시 연민을 느낀다. 예전에는 이 일에 고통을 느끼지 않았지만 요즘은 조금 무섭다. 대신에 비둘기라던가 나뭇가지라던가 까마귀는 아무렇지 않게 찍는다. 어제는 죽어있는 비둘기 한마리와 그 비둘기의 주위를 빙빙 돌며 구구거리는 또 다른 비둘기를 보았다. 한참동안 그 모습을 보았다. 비둘기로부터 이어진 생각은 아니었지만 내가 죽는 생각을 했다. 그러나 그 생각은 곧바로 오지은의 눈물로 이어졌다. 그것은 나를 너무나 슬프게 만들었다. 왜 나의 죽음은 다른 이들에게 고통이 되는 것일까. 혹시라도 내가 너보다 먼저 죽는다면 너무 슬퍼하지말라고 말했다. 내가 평안을 찾았다고 생각하라고 말했다.

죽는다는 것과 그저 이별하는 것과는 무슨 차이가 있을까. 어떤 존재가 더이상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은 왜 그렇게 슬픈 일일까. 나는 이렇다. 아마도 평생 이럴 것이다. 모든 것은 아름다운 의미로 가득 찼다가도 아무 것도 아닌 것이 된다. 갑자기 나는 내가 이 땅 위에 서있을 하나의 이유도 찾지 못하기도 한다.

오늘은 심장이 천천히 뛴다. 어쩌면 이것은 단순히 나의 심장의 문제일까. 나의 신경전달물질의 문제일까. 너무 구린 일이다. 나는 내 심장이 일정한 속도를 맞출 수 있도록 애를 쓰고 있다. 토마토랑 가지랑 양파랑 마늘이랑 구워먹고. 나는 어쩌면 이렇게 평생 불안과 허무를 오가며 살 것이다. 물론 그것이 행복한 각성일 때도 심심한 평안일 때도 있겠지만 결국에는 그것과 그것이다. 내가 세상의 모든 일에 의문을 그치는 날이 그것들에서 처량함을 발견하는 일을 그치는 날이 모든 불안과 기쁨이 그치는 날이 나의 죽음일 것이다. 어제는 눈물이 났지만 오늘같이 이렇게도 심심한 평안과 허무에서 그치는 것에 감사함 날도 있다는 것을.